레전드매거진 영원한 선율과 감동, 소프라노 김영미 – 레전드매거진

영원한 선율과 감동, 소프라노 김영미

1970년대의 이탈리아가 배경인 한 편의 음악영화 같았다. 그녀의 삶을 구태여 요약하자면.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목소리가 담긴 LP 음반을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유년시절부터 성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건너 간 이탈리아, 마리아 칼라스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고 수상한 뒤 미국에서 만난 파바로티와 함께 <사랑의 묘약> 여주인공 ‘아디나’로 꿈의 무대에 서기까지.. 이후에도 세계 무대에 진출하여 보낸 나날들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화려하게 펼쳐졌다. 인터뷰를 통해 성악가 김영미의 영화 같은 일대기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들의 역량을 발견하며 놀라움과 기쁨을 느낀다는 교육자로서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시간의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보았다.

이탈리아와 사랑에 빠진 그녀 세계무대를 누비다

영원한 선율과 감동, 소프라노 김영미

Q1. 선생님의 유년시절 이야기부터 들려주세요.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클래식과의 첫 만남, 그리고 성악을 전공하기까지.

저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저희 외할아버지는 작곡가이자 성악가이신 ‘안기영’ 선생님이신데, 살아생전에 ‘그리운 강남’ ‘마의 태자’ 같은 주옥같은 곡들을 작곡하셨고 가극 ‘콩쥐팥쥐’ ‘견우직녀’ ‘에밀레종’ 등 작품 창작에 힘쓰시며 음악에 한 생을 바쳐 한국 음악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랍니다.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머니께서도 피아니스트가 되셨고, 저를 포함한 자매들 모두가 음악을 전공했어요. 기악, 피아노, 첼로, 그리고 성악을 공부한 저까지. 전공 분야가 모두 달라 온 가족이 모이면 음악회가 열릴 정도로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노래를 하게 된 건 제가 특히 노래하는 걸 좋아하고, 잘했기 때문이에요. 전국 어린이 콩쿠르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드러냈답니다.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노래를 하며 살아가는 미래에 대한 확신은 점점 굳건해져 갔어요. 예원중학교를 1기로 졸업한 뒤 예술가를 양성하는 서울예고에 진학했고, 졸업 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성악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꾸던 꿈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죠.

외할아버지가 갖고 계시던 LP 음반들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들의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전축 스피커를 통해 깊게 울려 퍼지는 그들의 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이 콩닥거렸어요. 그들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나도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런 상상과 열망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이 훗날 저를 이탈리아로 건너가 아름다운 음악 세계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해서 당시 ‘사운드 오브 뮤직’ ‘송 오브 노르웨이’ 같은 음악영화들을 몇 번이고 보면서 영화 속 세계를 토대로 가슴속 나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었어요. 그 안에서 저는 늘 주인공이었죠.

Q2. 로마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셨어요. 1970년대는 이탈리아에 한국인 유학생이 극히 드물었을 무렵이기도 했 을 것이고,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인지도도 낮았을 텐데 이런 부분들과 현실로 직면하면서 겪었던 한국인으로서의 힘든 점은 없었나요?

이탈리아 유학 생활 초반에 만나는 사람들이 혹시 일본인이냐고 들 많이 물어봤어요. 한국인이라고 답하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예요?’ ‘베트남 근처에 있나?’ 등의 대답이 돌아왔었죠. 그만큼 아시아 국가 중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던 반면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시기였어요. 이와 더 불어 한국 내에서는 70년대 초반 개발도상국으로서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기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건너간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었어요.

고민 끝에 내린 한 가지 결론은, 무엇보다도 음악가로서의 실력을 키우자는 것이었어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어요. 음악가로서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언어의 장벽도 극복해야 하고, 한국과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에도 적응하며 사회성을 갖춰 나가야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한국을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제가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한국이라는 이름도 세계에 널리 알리며 제 눈앞에 보이는 모든 장벽을 넘어서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Q3. 일전에 다른 인터뷰를 한국의 동방 예의지국 문화 속에 자라났는데, 오페라 무대에서는 이와는 정 반대로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해서 그 점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밝히신 바 있어요. 앞서 말씀하신 답변 내용과 이 발언이 관련이 있을까요?

그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부분은 문화의 장벽에 대한 거예요. 오랜 시간 제가 자라 온 환경과 몸 안에 녹아있던 한국의 문화적 배경과 관습을 저와의 싸움을 통해 덜어내야 했어요.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노래를 하는 사람이기에 노래로서 감정을 표현하며 힘든 시간들을 극복해 갔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도 익숙해졌고, 많은 분들로부터 저의 음악이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제 안에 감춰져 있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 내면으로부터 나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콩쿠르에서 1등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내고 나니 이탈리아 사람들이 저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푸른 눈에 키가 산만한 서양인들 가운데 서서 나는 남한에서 왔으며, 지도상 대한민국은 이곳에 있다. 공식 명칭은 Republic of Korea다.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해주었어요. 그 후 제 유학 생활이 5년쯤 접어들 무렵, 많은 한국인들이 로마로 유학을 오기 시작했어요. 한국에도 제가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는 등 좋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인식이 한 걸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때 어머니가 저의 개인 매니지먼트 역할을 해주셨어요. 좋은 기회가 있다면 발품을 팔아 저와 함께 찾아가셨고,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을 할 때면 그 소식을 유명한 신문사에 직접 가서 전하며 지면에 게재되게끔 하셨어요. 어머니가 하신 일로 인하여 국제 콩쿠르가 무엇인지, 김영미가 누구인지가 한국의 언론을 통해 알려질 수 있었죠.

Q4. 지금은 이렇게 편안하게 말씀하시지만, 아마도 당시 오랜 유학생활 속에서 외롭고 힘들 때도 많았을 것 같아요. 내적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때 가장 힘이 된 건 무엇이었나요?

그건 세 가지로 답할 수가 있어요. 첫 번째는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이탈리아는 음악가로서의 실력을 쌓고 예술적 성장을 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니, 이대로 열심히만 한다면 세계 무대를 향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죠. 두 번째는 선생님과 부모님께서 저의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심어주셨답니다. 콘서바토리에서 당시 저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서 늘 제가 세계 일인자가 될 것이라고 북돋워주셨어요.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제가 세계무대에 당당하게 설 것이라며 저의 가능성을 지지해주셨죠. 세 번째는 저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하니 무엇도 두렵지 않았어요.

Q5. 이탈리아의 문화가 삶에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음악에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정서적인 측면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서양음악을 전공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혼을 제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 때는 심지어 꿈속에서도 이탈리아어를 하곤 했어요. 친구들도 모두 이탈리아 사람들이고, 한국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아침부터 잠이 들 때 까지 종일 이탈리아 말을 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시간이 지나 저 스스로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가 되었고, 그러면서 음악에도 큰 변화가 생겼어요. 눈을 감고 들으면 이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를 정도였어요.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의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심사위원 중 유명한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가 계셨어요. 복도에서 그분을 마주쳤는데, 키가 어마어마하게 큰 거예요. 지나가던 제 어깨에 손을 올리시고는 이렇게 작은 체구로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게 노래를 하냐고. 너처럼 노래하는 사람은 동양인은 물론이거니와 대회에 참가한 젊은 사람들 중에서 처음 본다. 그렇게 말하시며 포옹해주셨어요. 아마 서양음악을 하는 한국인으로서 어쩌면 가지고 있었을 한계를 넘어서 음악 속에 유럽의 색깔과 정서가, 혼이 제 안에 담겼던 것 같아요. 그렇게 국제적인 성악가로서의 발돋움을 시작했어요.

그 과정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어요. 아마 어릴 적부터 실력을 쌓아가고 유학 생활을 거치면서 정서적인 변화가 왔고, 그 변화가 약 10여 년에 걸쳐 제 음악세계를 서서히 물들여 간 결과였겠죠.

Q6.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 1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사랑의 묘약> 주연으로 발탁되어 파바로티 상대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하셨어요. 당시 오디션 비하인드와, 파바로티와의 호흡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들이 운명처럼 느껴져요. 원래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유럽에서 활동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만류하셨어요. 이유는 이탈리아의 강한 민족성과 문화 안에서는 제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살아남기가 힘들 거라는 거였어요. 저를 지도해주셨던 교수님께서도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시면서 이탈리아 사람과 결혼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결국 유럽 진출 대신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오페라단에 입단할 계획을 세웠어요.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저의 큰언니가 거주하고 계셨는데, 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오페라단에 전화를 걸어 오디션 계획을 물었어요. 그런데 필라델피아 오페라단에서 주최하는 파바로티 콩쿠르가 있다는 거예요. 아쉽게도 1차가 벌써 끝났다기에 그러면 2차는 언제 하냐고 물었더니 1년 후가 될 수도 있고, 2년 후가 될 수도 있다. 언제 열릴지는 알 수 없다고 했어요. 그 세월을 어떻게 기다리나 고심하다가 일주일 뒤에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파바로티 콩쿠르에 대한 문의전화가 너무 많아서 1차 오디션을 다시 보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오디션의 기회가 생겼어요. 첫 만남에서 파바로티가 제게 영어로 말을 건네기에, 이탈리아 말로 해달라고 당당히 이야기했어요. 그는 놀라며 이탈리아어로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이윽고 노래를 시작했어요. 노래를 마치니 파바로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2차 때 만나자고 말했어요. 성악가들에게 파바로티는 신과 같은 존재였어요. 그분이 제 노래를 듣고 일어서서 박수를 친 것 만으로 오디션에 합격한 듯 감격스러워서 어머니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떨었어요.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 최종 합격 전까지는 총 세 번의 오디션이 있었는데, 1차 합격 후 2차 오디션까지 3개월의 연습 기간이 있었어요. 콩쿠르에 입상하게 되면 오페라 ‘라 보엠’과 ‘사랑의 묘약’ 중 하나의 작품을 하게 되는데, 저는 평소 좋아하던 ‘라 보엠’을 특히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했어요. 그런데 소프라노 아리아를 열심히 연습하고 책을 덮고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테너와 함께 하는 이중창을 더 연습하지 그러니?’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마음의 소리를 듣고 나면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죠. 오디션 때는 아리아만 듣고 끝내겠지 생각하면서도 이중창을 연습했어요. 이중창의 연습량은 정말 방대했죠.

2차 오디션을 치르던 날은 뉴욕 사상 최대의 폭설이 쏟아지던 날이었어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리던 추운 겨울날이었죠. 학교도 회사도 전부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았어요. 당시 오디션 장소와 가까운 언니의 친구 댁에서 숙식을 하며 오디션을 기다렸는데, 가깝다고는 해도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는 그 눈발을 헤치고 스무 블록을 찾아가야 했어요.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보니 파바로티도 어머니도 이미 오디션 장소에 도착했다는 거예요.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걸어서라도 어떻게든 가보자 결심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저 멀리서부터 주황색 라이트가 반짝거리며 제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처음에는 제설 차량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까 택시가 비상등을 켜고 어디론가 느리게 가고 있었어요.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웠어요. 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열며 이 눈발을 헤치고 어디로 가냐고 묻기에, ‘저 성악하는 사람인데, 지금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 2차 오디션을 보러 가야 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했어요. 아저씨는 흔쾌히 저를 태우고는 오디션 장소 앞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셨어요.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내리는 저에게 ‘God Bless You!’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유유히 사라지셨죠.

택시에서 내려 커다란 철장의 문을 열고 홀로 걸어 들어가니, 저만치 끝에 파바로티가 앉아있었어요. 그리고 오디션장 한편에 저희 어머니가 말없이 앉아 기도하고 계신 모습도 보였죠. 기다렸던 제 순서에 도달했을 때 무슨 노래를 하겠냐고 묻기에 오페라 ‘라 보엠’의 ‘내 이름은 미미’를 하겠다고 말했어요. 연습한 대로 오디션을 마치고 나니, 파바로티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고는 저에게 테너와 함께 하는 이중창을 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소프라노 아리아 연습이 끝날 때마다 마음 한 편에서 연습을 좀 더 하라고 했던 그 곡이었죠.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고, 정신이 아찔해졌어요. 할 수 있다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반주가 시작되었고, 파바로티와 함께 연습한 대로 노래했어요. 노래가 끝나니 그가 브라보를 외쳤어요. 제 인생 최고의 칭찬이었죠. 한 달 뒤 최종 오디션까지 모두 마치고,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각 파트별로 남자 베이스 몇 명, 테너 몇 명, 메조소프라노 몇 명 이런 식으로 파바로티가 관할을 하면서 오디션에 뽑힌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씩 발표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 이름이 들리지 않았어요. 떨어졌나 싶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소프라노 파트 맨 마지막에 이르러 ‘영미 킴’. 제 이름이 들렸어요. 왜 제 이름을 가장 마지막에 불렀는지 물어보니 최고 점수였기 때문이래요. 대상은 원래 항상 마지막에 발표하잖아요. 감동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저희 가족들 모두가 저와 함께 울었어요. 기쁨의 눈물이었죠.

‘사랑의 묘약’을 준비하면서 파바로티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는 후배들을 사랑하고 아껴줬어요. 어떻게 연기를 하면 노래가 더 살고, 얼굴 표정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등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죠. 파바로티와 함께 숲 속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받아 노래도 하고, 사진도 찍었던 게 기억나요. 정말 꿈같은 시간들을 보냈죠.”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9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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