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매거진 밴드 ‘사랑과 평화’ 보컬리스트, 이철호 - 레전드매거진

밴드 ‘사랑과 평화’ 보컬리스트, 이철호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이름은
한국 음악신의 역사와 함께 쓰여졌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추억에만 잠겨 있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지금의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지난 40여년의 음악적 자취를 뛰어넘는
음악가로서의 강한 저력이니까.

레전드매거진 구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밴드 ‘사랑과 평화’에서 노래를 하고 있으며,
밴드 마스터인 이철호입니다. 반갑습니다.

PART 1 : 음악을 시작하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제가 돌 때부터 노래 10곡 정도를 흥얼거리고 있었대요. 또 학교 다닐 때는 오락 시간에 늘 빠지지 않고 앞에 나섰어요. 어릴 때부터 워낙에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영국의 유명한 그룹사운드 비틀즈가 막 등장할 때 였는데 학교 친구들과 멤버를 꾸려서 밴드를 만들었어요. 멤버들과 제가 각기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 밴드는 해체되었고, 그러다가 1968년도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밴드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 했던 밴드의 이름이 ‘피스’였습니다. 멤버들 중에서 제가 가장 나이가 어렸어요. 파주에 있는 미군부대에 유명한 음악 클럽이 두 개 있었어요. 하나는 블루엔젤, 하나는 파라다이스. 맞은편 클럽에서는 라스트 찬스라는 밴드가 연주를 하고, 저희 밴드는 파라다이스 클럽에서 연주를 했지요. 그때만 해도 한국은 지금처럼 연주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전자 건반도 없이 밴드 구성은 퍼스트 기타, 세컨드 기타, 베이스, 드럼, 보컬 이렇게 조촐했었죠. 그래도 주어진 환경 내에서 재미있게 연주했어요.

군부대에서의 공연 리스트는 세계적으로 히트친 유명 팝송들 위주에요.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밴드도 마찬가지였죠. AFK 방송 같은 데서 자주 나오고 유행하는 곡들이요. 그런 곡들을 해야만 했고요. 하지만 저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윌슨 피켓(Wilson Pickett) 같은 알앤비 소울 장르의 음악도 많이 했어요. 남들과는 조금 다른 곡 선택이었죠.

1972년도에 풍전 나이트클럽에서 파이오니아스라는 밴드를 할 때였어요. 당시 이남이 씨와 최이철 씨가 다른 밴드로 오디션을 보러 왔었는데, 오디션이 끝나고 남이 형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철호야 너 나랑 같이 밴드 할래?’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파이오니아스 밴드 마스터에게 이야기하고 다음날부터 남이 형이 있는 ‘영에이스’라는 밴드로 팀을 옮겨 노래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방위산업체로 가게 되면서 그 팀에서 빠지게 되었어요.

방위산업체 전역 후 1975년도에 김명곤, 최이철, 김태흥, 이남이, 그리고 저까지 다섯 명이서 ‘서울나그네’라는 팀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때 1세대 재즈 연주가인 김준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팀을 결성해 연습 을 하고 녹음도 하고 음반도 내고 활동하다가 미8군부대에서 한번 해보자 하고는 오디션을 보러 갔어요. 당시 미 8군 부대에 서려면 기획사 오디션을 통과해야 하고, 기획사 오디션을 통과하면 미8군부대에서 3개월 에서 6개월마다 실시하는 오디션을 봐야해요. 오디션을 보면 그 밴드의 등급이 매겨집니다. 그러면 전국 각지의 미군클럽을 순회공연 하고 투어를 마치면 다시 오디션에 임합니다. 실력은 기본이고, 객석을 사로잡아야하죠. 심사 평가도 냉철하게 진행됐어요.

저희 밴드는 A등급을 받을 걸 기대하고 오디션을 봤는데, B인가 C등급을 받았어요.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서 맹연습을 하던 중에 김명곤 씨가 방위산업체를 가게 되었고 그 자리에 이근수씨가 들어왔어요. 이근수씨는 앞서 말씀드린 1972년도에 영에이스에서 함께 밴드를 하던 친구에요. 근수가 들어온 뒤에는 흑인 음악 위주로 연습해서 다시 오디션을 봤는데, 더블 A 등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오디션에서 더블A등급을 받은 다른 팀들도 많았지만, 흑인음악으로 받은 밴드는 우리가 최초였어요.

실은 그때만 해도 나이트클럽에서 흑인음악을 하는걸 업주들이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백인들이 싫어한다면서요. 저희 밴드는 세계적으로 히트 친 팝들 연주도 많이 했지만, 때로 업주들에게 야단맞으면서도 흑인음악을 계속했어요. 어떻게 안 하겠어요. 좋아하는데.. 그저 음악이 좋았어요. 음악이 전부였죠. 저희 다섯 멤버는 미8군에 들어가서부터는 늘 함께 합숙하며 연습하고 투어를 다녔어요. 의정부에서 한 달, 동두천에서 한 달, 부산에서 한 달.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저희가 머무는 여관방은 저희의 숙소이자 연습실이었습니다.

합주는 장이형이 통기타에 줄 네 개만 연결해 베이스 기타를 만들고, 건반은 멜로디언으로 대신하고 드럼은 스틱으로 바닥을 두들기면서 했어요. 방 하나에서 그게 다 됐어요. 눈앞에서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하니 멤 버들의 기운이 온 방을 가득 채우며 전해지는 거예요. 또, 그렇게 작은 공간이니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게 연주를 해야 하죠. 내 소리를 줄이고, 남의 소리를 열심히 들으며 최대한 남을 배려하면서 내 소리도 내는 거예요. 그렇게 합주하면 멤버들이 연주하는걸 세심하게 보고 들을 수가 있어요. 음반 녹음을 할 때도 이 개념을 똑같이 가져갔어요. 방에서 하던 걸 소리만 증폭시킨 거죠. 그러다 보니 될 수 있으면 녹음도 한 번에 원테이크 방식으로 가려고 했어요. 드럼과 베이스 보컬 모두 원 테이크로. 그렇게 녹음하면 서로에게 전해진 느낌이 레코더에 모두 담기니까. 물론 베이스, 보컬, 드럼 다 따로따로 해서 입히는 요즘 방법이 시간도 절약이 되고 효율적인 방법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을 아끼려고 음악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섯 명이서 녹음을 했는데, 각자의 느낌이 다 다르고 얹혀지기만 한 것 같다면 맛이 안 나는 거죠. 그렇지만 어떤 방법이 옳다, 틀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 마다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홍길동부터 시작해서 외래어도 나오고 별의별 희한한 이름들이 다 나오 다가.. 남이 형이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사랑과 평화를 주면 어떻겠니?” 그 말이 차 안에서 나오자마자, 만장일치였어요. 바로 그거야! 그렇게 팀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PART 2 : ‘사랑과 평화’의 탄생

동두천 투어를 끝내고 부산에 갔을 때의 일인데, 지배인이 음악 하는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할 때 정문으로 다니지 말고 주방을 통해 다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말 안듣고 정문으로 다녔죠. 매니저가 ‘밴드가 왜 주방으로 다니냐’고 묻길래 우리가 ‘왜 밴드가 주방으로 다녀야 하냐! 자존심 상해서 연주 안 한다’고 하고 ‘야! 악기들 싸!’ 하고 그날로 그만두고 부대를 나왔어요. 이게 미8군에서의 마지막이었죠.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 이름은 그 무렵 만들어졌어요. 당시에 미8군부대 바깥에서 밴드 연주를 하는 걸 ‘일반’나간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만약 미8군부대를 그만두면 일반 다닐 때 이름을 뭘로 할까를 차 안에서 멤버들과 함께 고민하다가 나온 이름이죠. 홍길동부터 시작해서 외래어도 나오고 별의별 희한한 이름들이 다나오다가.. 남이 형이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사랑과 평화를 주면 어떻겠니?” 그 말이 차 안에서 나오자마자, 만장일치였어요. 바로 그거야! 그렇게 팀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퍼시픽 호텔 무겐에서 ‘사랑과 평화’를 시작했어요.

무겐에서 우리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다른 밴드들이 자기들 공연이 끝나면 2층 객석으로 올라가 우리 팀을 구경하기 바빴어요. 다른 밴드들과는 다르게 흑인음악을 많이 했었고, 펑크 장르가 생소하던 시기에 펑크를 했으니까 남들이 보기에 신기했던 거죠. 또 저희 팀이 유독 무대매너가 좋았어요. 저는 무대매너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가수가 콘서트를 하면 관객들이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시선이 온통 무대에 집중되잖아요.그러니 무대가 재미없으면 안 되잖아요. 제가 수십 년간 무대에 보컬로 서면서 지켜온 철학입니다.

명곤이가 제대한 뒤 밴드는 6인조가 되었어요. 이장희 형이 ‘한동안 뜸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 같은 곡들을 가져왔고, 그걸 멤버들과 연습했죠. 다 연습을 하고, 서울에 있는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별안간 일이 터졌어요. 남이 형과 제가 활동 정지를 받았던걸 매니저가 알게되었죠. 방송은 물론 나이트 클럽도 못나가고, 음악을 아예 못하게 활동 정지를 시켰던거죠. 결국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끼리 노래 녹음을 끝내고 사랑과 평화 밴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녹음은 같이 했어요. 저는 봉고를 연주하고, 남이 형은 베이스를 연주했어요. 노래만 안 했을 뿐이지. 노래는 철이랑 명곤이가 불렀어요. 그런데 그 앨범이 딱 히트를 쳤어요. ‘한동안 뜸했었지’가 특히 크게 히트 쳐서 방송을 많이 나가게 되었어요. 남이형은 반주 녹음만 하고는 팀을 그만뒀고, 난 남아서 무겐 나이트클럽에서만 같이 활동을 했었죠. 그런데 어떻게 그게 계속 이어지겠어요. 저도 팀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래도 조금 지나서 사랑과 평화 1집 리사이틀 공연은 저랑 남이형이 도와서 무대에 같이 올랐어요.

당시 밴드들은 자기들만의 드레스코드와 개성이 있었어요. 율동도 있었고요. 데블스, 라스트 찬스, 사랑과 평화 등등 유명한 팀들은 꼭 율동을 같이 했어요. 박영걸 사단 일원들은 특히 그런 걸 더 많이 신경 썼어요. 어쨌든 표정만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의상으로 존재감을 더욱 강하게 표출하는 거죠. 남이 형이 그런 걸 잘했어요. 몸뻬바지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무대에 오르거나, 한번은 테이블보를 슈퍼맨 망토처럼 두르고 무대에 오르지를 않나, 헬멧을 쓰고 미니 오토바이를 타고 무대에서 등장하기도 하고, 유도복을 입기도 하고. 그러니 사람들이 우리 무대를 보고 신선함을 느끼고, 재미있다고 느꼈던 거예요. 특이한 모습에 사람들이 간혹 필리핀 밴드로 오해하기도 했어요. 생긴 것도 그렇게 보이고(웃음)

PART 3 : 이철호의 음악관

활동 한창 하던 당시에는 크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어요. 나이트클럽이 시내에 몇 군데씩 전국에 다 깔려 있으니. 저희 밴드도 일 년에 딱 하루 쉬었어요. 6 월 6일 현충일. 옛날에 음악 하던 유명한 밴드들도 다 그날만 쉬었어요. 그날은 무조건 음악을 못하는 날이었으니. 지금도 매년 육육회라고 해서 당시 만나던 선배, 친구, 후배들과 6월 6일 날 모이곤 합니다.

사람들이 음악 한다고 하면 돈이 안된다고 자꾸들 그러는데, 저는 그러면 평생 밴드해서 돈 많이 벌어본 적 있냐고 되물어요. 밴드를 한다면 일단 생활보호 대상자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불만이 없어야 돼요. 어쩌겠어요. 정 안되겠으면 돈을 많이 버는 다른 일을 하던가. 음악을 할 때 목적이 내가 오늘 어디에 가서 얼마를 벌고, 그게 아니잖아요. 그저 음악이 너무 좋아서 하는 거지. 요즘 젊은 친구들 보면 얼마나 음악 잘해요. 그런데 우리 팀이 오래 음악 한 팀이라고 그 친구들보다 돈을 더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이걸 억울하게 생각해서도 안되는 거고. 돈을 잘 번다는 건 그 만큼 벌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무대에 올랐을 때의 저는 제임스 브라운이건 스티비 원더건 마음으로 존경할지언정 지지 않아요. 무대에서만큼은 제 인생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물론 그만큼 노력을 해야죠. 저보다 잘 하는 팀이 같은 클럽에 있으면 어떻게 견디겠어요? 이겨야죠. 이긴다는 건 싸움에서의 이김이 아니라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거예요. 퍼포먼스도 더욱 훌륭하게 해서 관객들을 사로잡을 줄도 알아야 하고. 몇십 번 몇백 번 그렇게 연습해서 관객들에게 더 좋은 반응을 끌어내면 제가 이기는 거죠. 그렇게 스스로 공부하고 터득해 갔어요.

당시에는 오히려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어요. 나이트 클럽이 전국에 다 깔려 있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옛날에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음악을 했으니 지금보다 환경이 더 좋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읽을 수 있는 가사가 없어서 천 번 만 번 귀로 듣고 노트에 옮겨 적으며 발음 하나하나를 다 연습하고, 멜로디를 달달 외우는 등 곡 하나 카피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들었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음악 하기에 지금보다 유리한 점들도 많았어요. 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카피를 하기 위해 똑같은 노래를 몇 천번 몇 만번 듣다 보니 그 음악의 맛을 더 잘 살릴 수 있었던 것도 같아요.

PART 4 : 사랑과 평화, 앞으로도 영원히

음악을 만드는 이론은 잘 몰라요. 꼭 이론을 완벽하게 꿰어야만 장인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숱한 경험을 통한 노력의 결과물이 있다면 장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장인 정신이라면 저에게도 있습니다. 본래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제가 곡을 만들게 되었어요. 다음 앨범을 만들기까지 6개월에서 7개월 정도 텀이 있었는데, 다른 팀원들이 곡을 안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만들기로 했지요. 컴퓨터 음악이 한창 한국에 확산될 무렵이어서 그걸 다룰 줄 아는 애한테 노트를 들고 찾아가서는 1번 컴퓨터를 켠다, 2번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이런 식으로 기록을 하고 안되면 전화하고 찾아가고 하면서 하나 하나 배우고 직접 입력했어요. 트랙 복사는 할줄 몰라서 못하고, 쿵쿵 따-이런 리듬을 곡이 끝날 때까지 백번 입력하고, 베이스도 하나 하나 다 연주하고. 그랬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안 맞고, 어떤 부분에서는 잘 맞고 그랬지요. 도움 주던 후배에게 틀린 거 어떻게 수정하냐고 물어보니 퀀타이징을 하라며 방법을 알려주더라고요. 그런데 퀀타이즈를 하니 연주의 맛이 전부 사라지고 음악 리듬이 밋밋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싹 다 지우고 백지상태에서 새로 입력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한 번은 노래를 먼저 부르고, 그 위에다가 코드와 패턴을 입혀 봤는데, 그렇게 만드니 너무 쉽게 만들어지더라고요? 미디 잘 다루는 후배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고, 정답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8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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