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매거진 집시기타리스트, 박주원 - 레전드매거진

집시기타리스트, 박주원

‘집시 기타 히어로’ 박주원은 한 언론의 표현대로
“축복처럼 찾아온 뮤지션”이다.
보는 이들의 넋을 놓게 만드는 그의 신들린듯한 기타 연주는
한국에서 그 대체재를 찾을 수 없는, 오로지 그만의 것이다.
평단에서는 이미 그에게 ‘젊은 거장’이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박주원은 2009년 데뷔 앨범 ‘집시의 시간’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혜성처럼 떠올랐다. 그동안 모두 5장의 앨범을 통해 집시 기타 열풍을 일으키며, 전인 미답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한국에 기타 연주 음반은 많지만,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집시 기타 음반은 박주원 전에 그 예가 없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곡을 직접 만든 박주원은 연주뿐 아니라, 탁월한 송라이터로서의 면모도 과시했다. 특히 그는 집시 음악을 한국적 자장(磁場) 안으로 끌어들여 이방의 음악들을 한국화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입니다. 프로로 데뷔하여 20년 가까이 활동하였는데 10년은 가수들의 반주를 해주는 세션 기타리스트로, 나머지 10년은 솔로 아티스 트로서 저의 음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집시 재즈를 필두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는 플라멩코에 바탕을 둔 다양한 월드 뮤직을 선보이고 있으며 집시 기타리스트의 선봉으 로 대한민국에 집시 음악을 알리고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타로 주목받던 소년

9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는데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학교에서 제 본명은 몰라도 그냥 ‘기타’로 통할 정도였고 저희 동네에서도 제가 직접 연주하는 모습은 못 봤어도 기타 치는 학생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자기 키만 한 기타 가방을 메고 다녔으니 눈에 띄는 점도 있었고요. 지금이야 인터넷 시대인 만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기타를 배울 수 있지만, 저 때는 학원을 가지 않으면 배울 방법이 없었는데 당시 저희 동네에서 기타를 배우는 초등학생이 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때는 기타리스트가 될 생각은 없었고 악기를 하나쯤 배워야 한다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시작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그런 학생이 되길 원하셨나 봐요.

사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어요. 그 당시엔 피아노 붐이 불어서 동네마다 피아노 학원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여자아이들이 배워서 남자인 내가 배울 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도 꾸역꾸역 7~8년 정도를 다닌 거 같아요. 오래 배운 만큼 악기를 잘 다룬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장기자랑 시간에 반장이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고 확 밀린다는 느낌을 받았고 동시에 ‘그래, 저게 남자의 악기지!’라는 생각이 들어 기타라는 악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기타도 같이 배우기 시작했어요.

저희 세대 부모님들의 교육열이 세다 보니까 중3쯤부터 대학 입시 때문에 기타를 그만뒀던 거 같아요.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입사하는 게 그 시대 일반적인 성공관이고 통념이었으니, 저도 예술가의 길을 걷기보다 자연스럽게 대입 준비를 했죠. 주변에 본보기가 될 뮤지션이라도 있었으면 그 사람을 보면서 음악인으로서의 꿈을 꿨을 텐데 하나도 없었어요.

클래식 기타만의 매력 :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다

일렉 기타나 포크 기타는 반주를 위한 악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요. 물론 솔로 아티스트가 있고 얼마든지 솔리스트가 될 수 있는 악기지만 기본적으로 일렉기타의 주된 역할은 록 밴드에서의 반주잖아요? 포크 기타도 마찬가지고. 클래식 기타의 매력은 멜로디와 반주를 같이 동시에 연주할 수 있다는 점 같아요.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다”라는 베토벤의 명언처럼 기타 한대로 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잖아요. 반주는 물론이고 멜로디나 애드립 같은 프런트맨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게 매력인 거 같아요.

피아노를 친 덕분인지 원래는 포크 기타를 배울 생각이었는데 기타 선생님의 권유로 더 어려운 클래식 기타를 배우기로 결정했어요. 어린 나이라 클래식은 지루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매력을 느낄 사이도 없이 시작하게 됐죠.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이곡 저곡 들으며 기타를 다루고 연주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었던 거 같아요. 내가 기타를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려 했던 게 아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타와 한 몸이 된 거 같아요. 학교가 끝나면 기타 학원을 가는 게 아주 당연한 일과였으니까요. 물론 또래 아이들처럼 오락실에 가고 축구를 하며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반드시 기타 학원을 마친 다음에 놀았어요.

형편에 여유가 있던 게 아니라 수강료가 아까워서 그랬던 이유도 있고, 또 제가 뭐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초, 중, 고등학교 내내 개근상을 받았거든요. 공부도 제법 잘했어요. 당시에는 공부해서 의사 판사 변호사가 되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보는 시대였기 때문에 공부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와 사회적 시선이 있었죠. 같이 하던 음악 친구들도 악기 연주 이외의 뮤직 비즈니스를 전혀 몰라서 음악을 포기하고 공부에 전념한 경우도 있어요. 나중에 뮤직 비즈니스라는 게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는데, 교육열이 높은 동네다 보니까 무조건 공부해서 대학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저항의 아이콘 : 일렉 기타

기타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대입 준비를 하던 고등학교 1학년 무렵, 교육열이 너무 지나치다 보니 이탈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드럼을 치던 밴드부 친구나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예체능 대학 지망생들에게도 일괄적으로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시키니까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거죠. 실기를 준비해야 할 친구들인데 야자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그렇게 이탈자들이 많아져 무리를 이룰 정도가 되자 무언가 슬슬 잘못되어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무언가 저항은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그런 시기였죠.

마침 비슷한 시기에 고등학교 정문 바로 앞에 일렉 기타를 가르치는 학원이 생겼고 그곳을 등록하면서 제 인생이 확 바뀐 거 같아요. 처음엔 방학 때만 잠깐 다닐 생각이었는데 완전 빠지게 돼버렸죠. 학교 동아리도 록 밴드부와 클래식 기타반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밴드부를 폐부 하면서 그 인원이 모조리 클래식 기타반으로 들어갔어요. 말이 클래식 기타반이지 밴드부의 위장 전입인 거죠.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저도 밴드를 하다 보니까 점점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기타는 다 똑같아”

당시 록 밴드들은 가을 축제 하나만 보고 1년을 버티곤 했어요. 가을 축제에 나가 무대에 서는 게 궁극적인 목표이자 록 밴드의 이유였죠. 록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던 친구가 제게 같이 축제에 나가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어요. 저는 당연히 클래식 기타라서 반려할 생각이었는데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야 기타는 다 똑같아, 그냥 들고 치면 되는 거야”. 그 말에 묘한 설득력을 얻어서 일렉기타를 잡은 게 신의 한 수가 됐던 거죠. 교문 앞에 생긴 일렉 기타 학원과 밴드부가 되어버린 클래식 기타반 그리고 지나친 교육열로 인한 이탈자들과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저항 의식까지 모든 상황이 맞물렸던 거 같아요.

정작 저를 음악의 길로 빠뜨린 그 친구는 서울 소재 대학교의 음악과 관련 없는 과에 가버렸어요.(웃음) 그렇게 진로를 확실히 정할 수 있게 된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아현 정보산업고등학교로 실용음악 수업을 받으러 갔어요. 그때 처음 생긴 커리큘럼인데 서울 내에 음악을 하려는 학생들이 다 모이는 곳이었죠. 그 시절 동기가 바이브의 유재현, 넬의 드러머 정재원과 기타리스트 이재경, 가슴앓이로 유명한 지영선도 있었어요. 오디션을 봐야 입학이 가능했던 만큼 서울에서 나름 잘한다는 친구들이 모여있는 학교였고 우물 안 개구리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간 첫걸음이니까 경쟁의식도 심했어요. 처음엔 서로 의식하고 경쟁하다가 음악으로 하나 되고 나중엔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됐죠.

집시 음악이란

집시 음악에 대한 유래는 몇 가지가 있어요. 인도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설도 있고, 이집트라는 설도 있는데, 유랑 민족이었던 집시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각 나라의 전통 음악과 자신들의 문화가 융합하며 탄생한 음악이 집시 음악이라고 합니다. 동유럽은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클래식한 집시 음악이, 스페인은 플라멩코와 융합하여 발전했고, 프랑스는 재즈가 기반이 된 집시 재즈라는 장르로 발전된 거라 할 수 있겠죠.

저는 초창기 집시 재즈에 관심이 많아서 1, 2집은 각 유럽의 집시 음악(집시 재즈와 플라멩코)을 두루 선보였고, 3집부터는 플라멩코의 색을 좀 더 강하게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절 집시 재즈 기타리스트라고 혼동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정확히는 집시 기타리스트인거죠. 엄밀히 말하면 집시 재즈와 플라멩코는 다른 장르니까요.

대한민국 최초의 집시 기타 앨범

사실 집시 음악이 어떤 이론이나 기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요. 본질적으로 집시들의 한을 노래하거나 연주로 표현하던 것이 오늘날에는 기술적으로도 발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저도 특별히 이론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클래식과 대학교에서 배운 재즈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20대 때 장고 라인 하르트(Django Reinhardt)를 알게 되고 관심을 갖다보니 동유럽의 집시 기타리스트를 알게 됐고, 집시 음악을 알게 되니 스페인 플라멩코와 플라멩코 기타리스트를 알게 됐어요. 집시 음악에 대한 정보는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찾아가면서 공부했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접근했던 것 같아요.

제 앨범을 ‘우리나라 기타 역사 최초의 집시 기타 앨범’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대중가요에 한두 곡 정도 라틴이나 플라멩코적 요소들이 있던 앨범은 있었지만 앨범 전체를 그런 색깔로 가져가는 경우는 제가 알기론 없다고 들었거든요. 사실 저 때도 참고할만한 국내 음악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특별히 배울 사람도 없었고… 그런데 저를 시작으로 집시 재즈 기타리스트들도 많이 생겨나고 플라멩코 음악을 하려는 친구들도 생겨나는 걸 보면 제가 나름의 영향을 준 거 같아서 뿌듯하죠. 집시음악을 시작하려는 친구들이 제 음악을 듣고 연습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 나갈 테니까요. 박주원의 향기가 느껴지는 그런 후배들이 나온다면 기분 좋은 일일 것 같아요.

제가 집시 음악에 흥미를 갖기 시작할 때부터 유튜브가 활성화돼서 테이프나 CD 시절의 선배님들 시절보단 훨씬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저희는 과도기잖아요? CD의 시대에서 MP3로 넘어가고 또 거기서 스트리밍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저흰 다 경험했으니까 테이프나 CD의 향수도 지니고 있으면서 스트리밍 서비스의 장점도 누리고 있잖아요. 장단점이 있는 거 같아요.

우연히 떠오르는 악상

앨범을 제작할 때 미리 컨셉을 정해놓고 작업하진 않아요. 전 우연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저의 4번째 정규 앨범 의 수록곡들도 일상 속에서 그냥 우연히 떠오른 멜로디를 바탕으로 완성된 곡이에요. 그런 우연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절대 탄생하지 않았을 곡인거죠.

전 주로 일상생활 속에서 악상이나 영감을 얻는 거 같아요. 작곡에 대한 환상이 있을 때는 악기를 들고 어떤 상황이나 장소에 직접 찾아 가야만 영감이 채워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몇 년 동안 제 음악을 발표하고 활동을 해보니 영감이라는 게 특별한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찾아온다는 것을 느꼈어요. TV를 보고 있을 때나 운전 중에 갑자기 떠오를 수도 있는 거예요. 지금 와선 작곡에 대한 환상 때문에 놓친 악상들이 많이 있는 거 같아 아쉬워요. 괜찮은 멜로디가 생각이 났는데 평범한 상황에서 떠오른 멜로디니까 별로라 생각하고 외면했었거든요.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바로바로 기록해놔요. 제 앨범의 90% 이상은 스마트폰에 녹음된 멜로디를 모티브로 발전시킨 곡들이에요. 창작이 안될 때는 예전에 녹음한 걸 들어보기도 하죠. 물론 누군가에겐 프랑스를 여행하며 느낀 경험이 영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이 아니어도 작곡을 할 수 있고 일상생활을 통해 멜로디가 나올 수 있다고 봐요.

끝없는 자기 검열

꾸준히 새로운 음악을 들으며 내 연주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고 보완해서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을 때, 계속 발전하는 나 자신에 희열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죠. 비록 관객이나 동료가 그 발전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제가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자기만족이거든요. 자기 검열이 끝나고 스스로 정리가 되어야 내가 만족하는 좋은 음악이 나오는거지, 내 마음에 안 들면 주변에서 아무리 좋다고 해도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 금전적인 보상 이상의 큰 만족감으로 다가와요.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초기에는 가수들의 작업에 참여하는 것 그 자체로도 즐겁고 참 행복했습니다. 존경하던 가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합주하고 녹음하고 공연도 같이 하며 ‘나도 인정받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전 태생적으로 프런트맨이고 싶었나 봐요. 가수의 뒤에서 반주를 하면 할수록 정체된 느낌을 받았어요. 함께한 가수의 무대는 계속 커져가는데 내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더라고요. 세션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 열망이 솔로 앨범 발매로 이어진 거 같아요. 솔로 아티스트 데뷔는 모든 연주자들이 꿈꾸는 건데 여러 현실적으로 이유로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한 명의 프런트맨으로 거듭나기까지

공연할 때 관객들이 와주시는 걸 보면 종종 놀라기도 해요. 어떻게 알고 찾아오시는 건지, 특히 크지 않은 지방 소도시에 공연을 할 때면 100명이던 200이던 저를 보러 와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어요.

제주도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한밤중에 그냥 심심해서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자주 가는 라이브 카페에 연락을 하다 보니 즉흥적으로 공연을 하게 됐어요. ‘30분 후에 박주원 씨가 공연을하는데 관심 있는 분은 오세요~’라는 즉흥적인 공연이었는데 40명이나 와주셨어요. 부랴부랴 제 CD를 들고 와주신 분도 계셨고요. 그렇게 사람들이 모인 걸 보니 느낌이 묘하더라고요. 그런 묘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어요. ‘내가 음악을 하길 잘했구나, 솔로 아티스트로 데뷔한 보람이 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요.

사실 마음은 가수 세션 할 때가 더 편해요. 나에게 주어진 부분만 문제없이 해내면 되는 거니까 그 부분 이외의 스트레스가 없죠.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공연의 흥행에 대한 책임을 세션인 제가 직접적으로 지지 않잖아요. 물론 친한 동료들과 함께 한 무대가 흥행하지 못하면 슬프긴 하지만요. 그런데 제가 프런트맨이 돼서 공연을 하다 보니, 공연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이며 곡의 순서나 분위기를 어떻게 잡아 나갈 것인가 하는 것부터 무대 위에서 관객의 반응이 미지근하면 즉흥적으로 곡의 순서를 바꿀 것인지 아니면 기타나 퍼커션 솔로를 넣어서 분위기를 환기시킬까? 하는 계획까지.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느 것 하나 제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의 책임이 고스란히 제게 돌아오기 때문에 세션맨 생활을 할 때 와는 마음가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러다 보니 솔로 활동을 하며 얻는 기쁨과 감동은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이래서 가수들이 공연을 하는구나 하고 깨닫기도 하고 큰 공연을 앞둔 가수들의 긴장감도 이해할 수있었어요.

나에게 기타란?

방과 후에 기타 학원을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하루 일과였고, 집이 넓지 않아서 손을 뻗으면 기타가 항상 닿는 곳에 있었어요. 저에게 기타는 어릴 때부터 함께한 장난감 같은 존재이자 생활의 한 부분이었죠. 주변에서도 저를 기억해주는 게 박주원 하면 기타 치는 친구, 제 이름은 몰라도 제가 기타 친다는 건 알았으니까 기타라는 존재가 저에게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거 같아요.

어릴 때 기타 학원이 가까이 있던 것도 행운이었고 기타를 내려놓고 대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 바로 앞에 일렉 기타 학원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이탈자들그리고 클래식 기타반의 밴드화까지 제게 기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 천운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양성의 공존을 위해

연주자로 살아남는 힘든 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같이 음악 시장의 규모가 더 크고 연주자에 대한 대우가 좋은 다른 나라도 똑같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팻 매스니(Pat Metheny)나 허비 행콕(Herbie Hancock)같은 초 A급 연주자 외에는 다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어요. 전 오히려 대한민국의 경쟁 체제가 연주자로 살아남기 더 수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외국 나가서 연주도 해보았고 해외 뮤지션들의 영상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저 신에 있었으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래도 제가 이런 어려움을 딛고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하는 이유는 앨범을 발매해서 연주자의 위상을 한번 올려보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요.

한 번은 방송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리허설 준비 중이었는데 스태프분이 갑자기 마이크를 세팅해주시더라고요. 솔로 기타리스트로 연주만 할 거라곤 생각 못 했던 거 같아요. 기타는 반주 악기라는 인식이 강하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이걸 주류로 만들겠다는 생각보단 이쪽 분야에 이런 연주자도 있고 저런 연주자가 있다는걸 알리고 다양성을 정착시키고 싶어요. 솔로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듯이 솔로 기타리스트도 있고 솔로 드러머도 있을 수 있겠죠. 다양한 장르, 다양한 요소들이 대중 음악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로 인해 이런 인식의 변화를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고 그런 면에서 저도 한몫 거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나름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 사이에선 집시 기타리스트로 알려졌으니까 어느 정도 공로를 하고 있겠죠?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노력할 거고 저를 보며 성장한 후배들이 저를 뛰어넘길 바랍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슈퍼스타 케이나 아이유 같은 통기타 싱어송라이터들이 대중 매체에 등장하면서 기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요즘은 다시 인기가 가라앉았는데, 대중들의 관심이 한번 식으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까 그 부분이 좀 걱정이 되죠. 한편으론 너무 활활 타올랐다가 한순간에 식어버리는 것도 안 좋아요. 너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면 중간에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꾸준하게 성장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도 10년 동안 5장의 앨범을 내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게 욕심내지 않고 꾸준하게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8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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