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매거진 [레전드인터뷰] 다큐/영화감독, 우광훈 | 레전드매거진

다큐/영화감독, 우광훈

“2005년 미국의 전 부통령 엘 고어가 한국의 한포럼 행사에서 강연 도중 ‘서양의 구텐베르크 금속 인쇄술은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은 기술이다. 나는 이를 스위스의 인쇄박물관 에서 알게 되었다’고 말했어요. 타국의 중요인물이 서양 인쇄술의 역사가 뒤집힐 수도 있는 엄청난 발언을 한 거죠. 저희는 엘 고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구텐베르크 금속 인쇄술이 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를 물었죠. 손에 쥔 것은 의문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탐정이 된 기분으로 카메라 한대와 최소한의 장비만 갖추고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소통의 힘
다큐/영화감독 우광훈

매거진 뉴욕타임스는 지난 2000년간 인류에게 일어난일 중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독자적 발명을 손꼽는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인쇄술의 역사가 태동되어 인류의 문명을 꽃피우는 시발점이 되었 다. 그러나 서양에서 굳건히 믿고 있던 구텐베르크의 신화는 1234년 고려에서 금속활자가 최초로 발명되었으 며,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재기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 감독과 제작진은 심증은 난무하나 직접적인 증거는 전무했던 금속활자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그들은 독일의 구텐베르크 박물관을 시작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의문의 단서를 찾아 유럽을 횡단했다.

정해진 답은 없었다. 무엇을 만나게 되고 어떻게 사건이 전개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으니. 다만 이들은 동서양 교류의 역사 속 연결점을 찾고 싶었다. 이념의 다름과 종교의 다툼, 국가 간의 이해관계 등 갈등의 이면에 담겨있는 존재 자체의 가치에 주목했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과거 한국과 유라시아 국가들 간 소통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여행 다큐멘 터리입니다. 살짝만 공개하자면 우리가 몰랐던 숨겨진 교류의 역사를 찾아내는 성과가 있었어요. 얼마 전에 촬영을 끝내고 편집 중인데, 관련 영화제를 통해 선공개 후 올해 8월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유학시절 전공을 영화학으로 바꾸셨죠?

네. 본래 전공은 스페인어예요. 오마하 주립대 어학연수 시절, 오래전 부터 품고 있던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고자 아이오와대 영화학과로 과감히 전과했습니다. 부모님께는 비밀로 했어요. 반대하실게 뻔하니까. 실은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려 했는데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제가 감독으로 참여한 뮤직비디오가 TV를 통해 방영되면서 우연한 계기로 가족들이 진실을 알게 됐어요.

진실을 알고 난 후,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아버지께서는 늘 제가 졸업 후 외교 관이 되기를 바라셨는데, 기대와는 달리 영화를 하겠다고 하니 아무 래도 염려가 크셨죠. 굳이 왜 그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 만류하 셨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제 작품에 누구보 다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으셔서 제주 국립박물관 도슨트를 하셨던 아버지의 자문은 직지코드 제작과정에서큰 힘이 되었어요. 직지코드는 저에게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 기도 하고요.

<직지코드(Dancing with Jikji)>

데뷔 17년 만의 입봉작이잖아요. 직지코드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 앞에서 상영되는 순간, 어떤 기분이었나요?

그간 고생한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어요. 2000년에 영화학과 졸업 후 미국의 한 *방송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는데, 이를 마다하고 귀국을 했어요. 돌아와서는 한국 영화계에 오래 남을 멋진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당시 준비하던 작품이 비중으로 보자면 극영화가 70%, 다큐멘터리가 30% 정도였는데 10여 년 동안 조감독으로 참여하던 5~6 개의 영화가 공중분해됐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실질적인 소득이 없는 허무한 나날들이 연달아 이어지니 점점 영혼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러다 주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는데, 다들 마찬가지 였어요. 영화계에서 한 편의 영화를 내놓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죠.
그 모습을 보며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며 한편으로 용기를 얻기도 했었고, 그러다 17년 만에 어렵사리 입봉을 하게 되었는데요.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났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를 걱정하시며 장례식 도중에라도 영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반드시 참석하라고 당부하 셨거든요. 실제로 첫 상영시 상복을 입고 관객들과 마주했습니다. 상영시간 내내 관객들의 표정을 살폈어요. 영화의 표현과 의도에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거든요.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공통된 메시지는 하나예요. 전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우리는 그 메시지를 춤으로 표현했습니다. 토론을 하던 중 때로 갈등이 불거져도 만남의 끝은 늘 춤을 추며 화합하는 일로 마무리했죠. 사건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을 담아내는 과정의 말미에 춤을 추는 것이 포함되게끔 연출했어요. 직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그것이니까요.
교류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느낄 때가 많았어요. 과거 먼 나라를 이동할 때 사용했던 몽골 제국의 ‘파발마’ 시스템을 보면 말을 타고 한참을 이동하다가 말이 지치면 지금의 정류장과도 같은 곳에서 다음 말로 갈아타면서 20일 만에 유럽 대륙까지 도달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이처럼 까마득한 과거인 700년 전에도 교류를 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누가 더 잘났는지 우열을 가리며 한쪽으로 편향된 세계관을 드러내기보다는 서로의 연결성에 주목하고 싶었죠.
한 가지 또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프랑스에서 직지심체요철의 원본을 은폐하는 이유를 밝히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이를 반환해야 한다는 세계적인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에도 현재까지 우리는 직지를 오로지 복사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원본은 은폐된 상태죠. 다큐를 통해 그 이유를 좀 더 파헤쳐 보고자 했습니다.

영어 타이틀 ‘Dancing with Jikji’가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토론이 끝나면 춤을 췄어요. 토론 중 아무리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격양되어도, 이야기를 끝낸 뒤에는 화합의 의미를 담아 그 자리를 춤으로 마무리했 죠. 시도하기 전까지 그 방법이 통할지에 대해서 반신반의했어요. 스태프들의 반대 의견도 있었고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목석처럼 앉아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보수 적인 도서관장, 근엄해 보이는 교수들이 우리의 제안에 흔쾌히 따라주는 거예요. 복잡한 이해관계를 벗어나 춤을 추는 그 순간만 큼은 모두가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죠. 직지의 뜻을 보면 ‘직’은 체험하다. 직접 어떤 행위를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춤으로 갈등을 풀어보자는 아이디어는 여기서 나왔어요.

촬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우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도난사건. 로마 에서 촬영을 모두 끝낸 마지막 날,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에 취해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촬영 원본과 장비를 모두 도난당한 후였어요.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허탈함이 앞섰죠.
또 한 가지는, 민감한 소재를 다룰 때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인상 깊었 어요. 때로 우리의 주장을 인정할 때도 있었 어요.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는 ‘그래. 너희 말대로 너희가 주장하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의 증거를 이야기했으 며, 너희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흔쾌히 수락했어요.
저는 이런 태도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우리는 정치적 성향의 다름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견해 차이로 양극단으로 갈려 내일은 다시 안 볼 것처럼 싸우기도 하죠. 하지만 각자의 생각이 달라도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서로의 생각과 입장 차이에 겸허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요. 이를 깨닫는 경험은 저에게 자아를 찾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작품을 하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층 성장했고, 사람들과 교감했던 경험은 저의 일부가 되었죠. 가능성에 대해 두려 움부터 앞섰던 모든 사고의 틀을 깨부쉈고, 세상 어딘가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우광훈>

미디어 아트와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소설과 시로 비유하면 어떨까 해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서사가 나열된 소설을 쓰는 것과 같아요. 시간과 이미지의 흐름이 플롯에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되죠. 반면에 비디오 아트는 시간과 이미지를 겹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함축해서 표현합니다. 공통점은 도구가 같죠. 영상매체를 사용하니 까요.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일화가 있다면?

그날은 제주도 4.3 민주항쟁에 관한 스토 리를 작업하고 있었어요. 시민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동굴로 찾아가 맨발로 웅크리고네 시간 동안 동굴의 차가움을 느끼는 작가의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어딘가에서 도슨 트와 관람객 무리가 우르르 몰려왔어요. 그들이 놀랄까 봐 일단 숨어있었는데, 동굴 깊숙이 어디에선가 지네 한 마리가 툭 튀어나온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제 정체를 들키고 말았죠. 하필 열두 명의 무고한 시민이 이곳에 갇혀 억울하게 학살을 당했다는 설명이 진행되던 순간에 일어난 저를 보며 사람들은 귀신이 아니냐며 웅성웅성 난리가 났어요. 더 이상 오해가 생기면 안 되겠다 싶어 차분하게 제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갇혀 있던 사람들의 답답함을 느껴보고 비디오에 담기 위해 이곳에 웅크리고 있었다고. 그런데 도슨트 할아버지가 제주방언으로 ‘제정신이 아니구먼. 학살이 일어난 동굴은 여기가 아니라 저 쪽이다. 갈 거면 제대로 찾아갔어야지 알지도 못하고 엄한 곳에 웅크리고 있니.’ 하셨죠. 관광객들은 작가가 그런 것도 모르고 온 거냐며 웅성거리 고. 창피했어요. (웃음) 이 에피소드는 차기 작으로 준비 중인 4.3에 관한 영화 “비바리 Viva Lee”라는 작품에 스토리로 포함 시키 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다큐멘터리를 계속하실 생각인가요?

네. 하지만 반드시 다큐멘터리만 고집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본질적 맥락은 동일해요. 소재에 관한 조사와 탐구를 모두 마치고 여기에 다른 현상과 새로운 소재를 입히는 것이 극영화라면, 조사한 소재를 따라가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변화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이 다큐멘터리죠.
극영화에 아무리 탈현실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다 할 지라도,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이 땅의 모든 것에서 피어난 소재이거나 이로 인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본질은 동일 하다고 보는 거예요.
앞으로도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요. 예를 들어 저희 작품의 주장에 대해 반박론이 재기된다면 카메라를 들고 반박론을 재기한 사람을 찾아가 왜 우리 작품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지, 근거는 무엇인지 이야기를 듣고 따져봐야겠죠. 그런 과정은 곧 새로운 작품이 될 거고요. 어떤 역사적 사실 하나를 찾아내면 이를 증명하는 데에는 적어도 50년 가까이의 세월이 걸린다고 해요. 즉 우리가 1년, 2년간 연구하고 촬영해 필름에 담아낸 것을 사건의 종결이라고볼 수는 없는 거예요. 다큐의 특성상 사건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과정은 필연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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