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인터뷰] 015B, 장호일 | 레전드매거진

015B, 장호일

배꼽티가 경범죄라는 논란이 일자 법원에서는 ‘막을 수 없는 유행은 무죄’라며 패션피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새까만 선글라스에 흰 민소매티셔츠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피무늬 티셔츠에 긴 머리를 파마한 청년 등 차림새도 각기 다양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개성을 어떻게 드러낼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1990년대는 바야흐로 X세대의 전성기였다. 공일오비는 그 무렵 등장했다.

“지구를 살립시다. 내일은 늦으리!” 1992년 10월 25일, 당대에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들이 모두 참여한 막강한 라인업의 환경보호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1회 무대의 막이 올랐고 생중계를 전하는 카메라가 바삐 움직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넥스트, 윤상, 김종서, 이승환. 그리고 마침내 방송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공일오비의 무대가 전 국민의 안방으로 실시간 송출되었다. TV를 보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스치던 당혹감은 이내 환희로 바뀌었다. 머리 뒤로 넥타이를 두르고 하우스 리듬의 건반 연주에 춤을 추며 노래하는 김태우의 모습은 서울대 출신의 밴드로 흔하게들 떠올렸던 모범생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더욱이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리듬의 음악은 사람들을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 무대 이후 그들은 단번에 이름을 알리며 가요계의 밀리언 셀러가 된다.

당시 공일오비의 음악적 시도는 X세대를 상징하기에 충분함과 동시에 시대를 관통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장 진보적이며 트렌디한 음악가였으며, 유행을 흡수하면서도 그보다 한 단계 앞선 것을 시도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전자음악을 앨범에 도입해 유행시키는가 하면, 직설적인 작법으로 가사를 쓰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1집 앨범 발매 후 29년째 되는 해인 올해도 이들의 새로움을 향한 음악적 행보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판도를 바꾼 그룹

공일오비(015B) ‘장호일’

Q. 안녕하세요 호일님. 취재에 앞서 공일오비의 팬으로서 인사드립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도 많지만 우선 최초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시기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음악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LP 음반을 접하면서부터에요.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무렵이었던 것 같네요. ‘딥 퍼플’(Deep purple)의 ‘하이웨이 스타’(Highway Star)라는 노래를 LP 음반으로 처음 듣고 화려한 기타 연주에 매료되었죠. 처음에는 그 악기가 뭔지도 몰랐어요. 이전까지는 세상에 음악이 클래식만 존재하는 줄 알고 있었으니까. 찾아보다가 그 소리가 일렉기타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딥 퍼플(Deep purple) 외에도 블론디(Blondie), 비지스(Bee Gees) 등 다양한 팝 음악 LP 음반이 집에 있어서 자주 들었어요. 또 용돈을 모아서 갖고 싶었던 LP 음반들을 직접 구입하기도 했죠. 그러면서 점점 음악을 직접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났던 것 같아요. 앞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운 경험이 음악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어요. 노래를 여러 번 들으며 독학으로 기타 연주를 익혔어요.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하나씩 스스로 터득해 나갔습니다. 돌아보면 ‘오늘부터 음악을 해야지!’ 이렇게 결심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음악이 너무 좋아 계속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거죠.

Q. 그럼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나요?

기타를 연주하면서 마음속에 락스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고3 때 어머니가 학업에 집중하라며 기타를 압수하셨어요. 그날 어머니에게 ‘그럼 내가 서울대에 입학하면 기타를 돌려주고, 앞으로 나 음악 하는 거 허락해줘!’라고 했죠. 어머니 입장에서는 좋은 대학에 간다는데 안된다고 할 이유가 없죠.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어요. 아슬아슬하게 서울대에 합격하고, 발표가 난 바로 그날 약속대로 어머니께 기타를 돌려받았어요. 실은 어머니가 기타를 어디에 숨겨둔 지 알고 있었거든요? 몰래몰래 꺼내서 연주하고는 했는데, 합격자 명단에 오른 날부터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연주했죠.

대학에 들어가서는 교내 밴드를 했어요. 당시만 해도 프로 뮤지션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취미 삼아 하던 쪽이었는데,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TV 예능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 저희 밴드가 출연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PD가 우리를 좋게 본 거예요. 서울대 출신에, 외모들도 괜찮고 하니. 저희를 따로 불러서 고정 출연을 제의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멤버들 모두가 들떴죠. 우리 앞으로 인기 많아지겠다면서. 그런데 실은 그날이 저의 군대 영장이 나온 날이기도 했거든요. 멤버들에게 ‘미안한데, 나 영장 나왔어.’라고 솔직하게 말을 했죠. 제 이야기 듣자마자 리더 형이 ‘야 때려치워!’ 한마디 하고 팀은 해산됐어요. 정말 아쉬웠죠.

군대를 다녀온 뒤, 정석원 씨가 밴드’무한궤도’의 건반 주자로 합류했어요. 자연스럽게 저와도 몇 번 왕래가 있다가, 신해철씨가 기타를 연주할 라이브 세션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셨어요. 흔쾌히 수락하면서 저 또한 무한궤도에 합류하게 되었습 니다. 당시에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그때 자연스럽게 프로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같아요. 이후 신해철씨는 무한궤도를 나와 솔로로 활동을 시작하고, 제작사에서는 신해철 씨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에게 기획사에서 앨범 제작을 지원해줄테니 해보자고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게 015B에요.

처음에는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요. 앨범 한 장 낸 것을 기념으로 한 뒤 해산하고 각자의 길을 가려고 했었죠. 실제로 1집 앨범 발매 후 각자 복학하고, 취직하고 그랬어요. 저는 광고 회사에 취직을 했었고요. 그러던 중 발매 9개월인가 10개월 만에 갑자기 그 앨범에서 윤종신 씨가 피처링한 ‘텅 빈 거리에서’라는 앨범이 확 떴어요.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차트 역주행을 한 거예요. 앨범 판매량이 늘어나고 사람들의 반응이 생기니 제작사에서 우리 멤버들을 10개월 만에 불러 모아 2집을 제작하자고 했어요. 그렇게 2집이 3집이 되고, 3집이 4집이 되면서 지금까지도 평생 음악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Q. 그렇군요. 현재의 관점에서 1990년 발매한 공일오비의 1집 앨범을 돌아보시면 어떤 느낌인가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첫 앨범이니까 솔직히 어설픈 느낌이 강하죠. 하지만 그 어설픔 안에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요. 저희가 2집부터 미디 음악을 도입했어요. 1집은 미디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풀 밴드 세션이에요. 그래서 연주 실력을 숨길 수가 없죠. 어떤 부분은 그래도 곧잘 했고, 어떤 부분은 부끄럽기도 해요.

공일오비 멤버 구성은 건반, 기타, 베이스 이렇게 3인조였고, 객원 보컬과 함께 했기 때문에 드럼이 없었어요. 앨범 녹음을 위해 저희가 사장님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 ‘김희현’씨 섭외를 요청드렸어요.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신인들이었으니 대 선배가 녹음실로 걸어들어오시는 모습조차도 너무 신기했어요. 멀찌감치 지켜보다가 들어오실 때 90도로 폴더 인사하고 그랬죠. 존경하는 대선배를 세션으로 모셨다는 것이 저희에게는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드럼 스틱이 담긴 가방을 들고 계단을 통해 올라오시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Q. 지금의 장호일 님은 그때의 김희현 씨처럼 후배들이 존경하는 대선배가 되셨네요.

공일오비 세션 하러 오는 후배들이 어릴 때부터 015B 선배들 앨범 들으며 자랐다고, 함께 연주하고 있으니 기쁘다는 말들을 많이 해요. 스스로 감격에 겨워서 SNS 에 글 올리고 하는 거 보면 ‘나도 저랬었지’하며 흐뭇하죠. 1990년에 1집 앨범 발매 후 지금까지 공식 앨범은 8장을 발매했고, 디지털 싱글과 스핀 오프 앨범 등 이것 저것 다 따지면 앨범을 60개 이상 발매했어요. 모든 앨범이 다 기억에 남고 정이 가지만 특히 데뷔 앨범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어설프지만 열정 넘쳤던 그 시절이 함께 떠오르거든요.

Q. 최근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 부탁드릴게요.

작년부터 디지털 싱글 앨범 발매 체제를 도입했어요. 세상이 바뀌었으니 바뀐 시스템에 맞추어 가는 거죠. 월간 윤종신 등 주변의 영향이 있기도 했고요. 정규앨범 CD 한 장에 열 곡 정도가 들어가잖아요? 예전에는 일 년에 CD를 한 장씩 냈으니 이걸 한 달에 하나씩 나눠서 발매한다 가정하면 한 달에 한 곡 정도더라고요. 초반에는 이런 방식이 적응이 안 돼서 힘들고, 제작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렸는데 요즘은 작업 프로세스가 몸에 익어서 작업을 다 하고 나면 시간이 2주 정도 남기도 해요.

예전에 앨범을 낼 때는 타이틀곡 위주로 많이 신경을 쓰고 다른 곡들은 덜 신경을 쓰는 경향도 있었는데,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니 매번 발매하는 곡이 타이틀곡이라서 모든 곡에 더욱 신경을 쓰게 돼요. 또, 이번 달에는 무엇을 해볼까를 고민하다 보니 더욱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단, 화제가 되었다가도 실시간 음악 차트에서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순식간에 옛날 노래가 되어 버리니까 그런 점은 조금 아쉽죠.

Q. 제작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곡이 좋아야죠. 그런데 그건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나 좋은 곡을 쓰고 싶어하는데, 그 곡이 좋은 곡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듣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거고,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발매하는 것 까지가 우리의 일이지요. 저는 세상의 음악들이 장르가 아닌 누군가의 귀에 듣기에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들로 구분되는 것 같아요. 좋은 곡의 정의는 거창할 게 없어요. 듣는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노래죠. 랜덤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틀어놓거나 빌보드 차트를 듣다 보면 그중에 몇 곡이 귀에 딱 꽂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저랑 비슷하게 느끼더라고요. 아마 대체로 듣는 귀는 비슷비슷하지 않을까요.

Q. 공일오비 앨범 수록곡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을 다섯 곡만 뽑는다면 어떤 걸 고르시겠어요?

데뷔곡인 ‘텅 빈 거리에서’가 첫 번째죠. 그 곡이 역주행을 하면서 2집을 내고, 3집을 내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곡이고요. 작년에 발매한 ‘나의 머리는 녹색’이라는 곡도 최근 싱글 중에서 정말 좋았던 곡이에요. 또 저희의 히트곡인 ‘아주 오래된 연인’ ‘新인류의 사랑’ ‘잠시 길을 잃다’ 등.. 좋아하는 곡이야 참 많죠.

저희 밴드의 특징 중 하나가 컨셉 밴드라는 거에요. 곡을 만들 때 각 가수들에 걸맞은 그리고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대로 명확한 컨셉을 잡고 시작해요. 예를 들면 빈티지한 스타일로 로우파이 사운드를 보여주자던가. 그럼 표현양식들을 재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내고 목소리와 창법, 이펙터까지 전반적으로 컨셉과 어울리게 구상하죠. 들을 때는 장르 신경 안 쓰고 좋은 노래 즐겨 듣는데, 만들 때는 장르와 컨셉을 신경 쓰고 있어요.

Q. 실은 윤종신 씨가 부른 어머니에 대한 노래 듣고 울컥했어요. 너무 슬퍼요.

그 노래는 저희 사이에서 금지곡이에요. 노래가 너무 슬퍼서 연주를 못하겠어요. 콘서트 때도 하고, 방송에서도 했는데 연주할 때마다 너무 힘들어요. 노래하는 윤종신 씨도 울컥하고요.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그 노래 연주하다 보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노래가 너무 슬프니까 관객들마저 분위기가 가라앉아요. 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를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수습이 안돼요. 예전에 저는 무대에서 눈물을 흘리는 걸 설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설정이 아니라 정말 슬퍼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노래를 통해 처음 느껴봤어요. 그래서 저희끼리는 그 노래를 봉인하기로 했어요.

Q.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시는 모습이 팬들에게 늘 귀감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저희 멤버들 성향이 원래 그래요. 호기심이 많고, 신기 것을 찾아 헤맨다고 할까요.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시도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사람의 감수성은 30대가 넘어가면서 굳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굳은 감수성을 굳은살 관리하듯 말랑말랑하게 관리해야 해요. 갈아주고, 로션도 발라주고요. 우리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니 지속적인 감수성 트레이닝이 필요한 거죠. 새로운 음악도 많이 찾아서 들어야 하고요. 나이 들수록 더욱.

친한 후배가 전에 ‘큰형님이 되면 왜 다들 연습을 안 하는 걸까?’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전 그 말 듣고 난 연습 열심히 하는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과거에 만든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만 안주하고 안도하며 제자리에 있어서는 안되죠.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해요.

Q. 감수성 관리를 위해 하시는 노력 중 음악 외적으로 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영화를 많이 봐요. 저는 영화광이에요.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2000년대 초반에는 영화 제작자를 꿈꾸기도 했어요. 주로 비현실적인 소재의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이에요. SF, 호러, 판타지. 이런 것들.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을 즐기다가 돌아오는 걸 좋아하죠. 현실적인 영화요? 그런 건 지금의 현실로도 충분해요(웃음)

Q. 방송에서도 종종 모습을 드러내시던걸요.

요즘 SBS ‘불타는 청춘’에서 만난 인연들과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내시경밴드’라는 이름으로 멤버는 김광규, 김도균, 김완선, 저까지 네 명이서 일회성으로 공연을 했는데 그 공연의 반응이 좋아 콘서트를 하게 되었죠. 8월 말에서 9월 초쯤 싱글도 발매될 계획입니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단발성이 었는데 공연을 하고, 싱글도 발매를 하게 되다니, 하면서 신기해하죠.

새로운 조합의 멤버들과 함께하면 새로운 관점과 색깔을 볼 수 있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음악을 한다는 것은 때로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결과를 야기하는 것 같아요. 이런 걸 지켜보는 게 상당히 흥미로워요.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예전부터 궁금한 게 많고, 호기심도 많은 사람이라서 내 분야가 아니라도 겪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요. 예를 들면 레게 음악을 직접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누가 레게 음악을 하면 잠깐 가서 콜라보레이션도 해보고 아, 이게 레게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죠. 그렇게 하나 더 배우고 경험하고 가는거죠.

Q. 음악을 하는 것과 영화를 보시는 것 외에 다른 취미가 있으세요?

예전에 게임을 잠깐 좋아하긴 했었는데 잠깐이었고요.. 저는 취미가 직업이 된 케이스라서, 실은 누군가 연습 끝나거나 공연 마치고 집에 가서 뭐 하냐고 물어보면 기타 친다고 대답해요. TV를 좀 보다가 기타를 치고, 합주를 서너 시간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기타 치고. 아까는 이게 좀 안됐었는데 하며 될 때까지 해보고요.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인데, 기타는 어떻게 평생 싫증을 안 내는지 저에게도 그 점이 미스터리에요. 유튜브를 봐도 절반은 기타나 악기 관련된 걸 봐요. 새 장비, 시연 영상 같은 것들이죠. 유튜브를 보다 보면 다양한 정보들을 많이 알게 되잖아요. 전에 좋아했던 밴드의 무대 바깥에서의 이야기라던가. 앞서 말한 새로운 장비에 대한 정보라던가요. 그런 걸 보다 보면 시간이 금세 가죠.

Q. 장비 쪽에도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원래 저희 팀이 새로운 장비에 관심이 많아요. 특히 정석원 씨는 장비 콜렉터 수준이에요. 예전에는 진짜 악기들을 많이 썼는데 요즘은 플러그인 시대니까 플러그인 콜렉터라고 할까요? 정석원 씨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플러그인을 가장 많이 갖고 있어요.

Q. 다른 뮤지션들과 정말 많은 콜라보레이션을 하시잖아요. 그분들과 소통하시는 공일오비만의 작업 방식이 있나요?

함께 작업하는 보컬리스트들은 일단 진행에 앞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저희 또한 그 분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최대한 노래하는 분의 색깔과 개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맞춰서 작업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음악 작업을 하다 보면 각자 고집도 세고 서로 의견이 달라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그것도 작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화를 낼 이유가 없죠. 그저 흥미로워요. 사람들은 다 다르니까요. 노래를 해도, 기타를 연주해도, 저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고 그런 다른 면들이 곡 작업에 영향을 끼치거든요. 관찰하다 보면 재미있죠. 우리가 생각하지 못 했던 걸 누군가 해내는 걸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하고요.

요즘은 나이가 있어 여유로워진 것도 있지만 저희들도 한창 혈기왕성할 때는 녹음실에서 거칠게 싸우기도 했어요. ‘때려치워!’하고 뒤엎고 다음날 화해하고 다시 작 업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죠. 작업하다가 신경이 예민해져 화를 내더라도 사람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걸요. 아마도 극복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그걸 모르 던 어린 시절에는 무턱대고 싸우고 화만 내기도 하고 그랬었죠.

Q. 다음 질문입니다. 음악가들 만나면 항상 하는 질문인데요. 호일님은 우리 삶에 음악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악은 사람의 감정을 해소, 배설,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하죠. 음악을 들으면 추억이 떠오르잖아요. 옛날에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즐겨듣던 당시의 공기와 분위기와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재현돼요. 음악이 추억을 데려오죠. 또, 이별하고 듣는 슬픈 노래는 다 내 노래 같잖아요. 듣다 보면 감정이 치유되죠. 계 속 슬퍼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눈물도 안 나와요. 그렇게 감정을 정리해줘요. 또 ‘이젠 안녕’ 같은 곡은 졸업식에서 많이 쓰이니, 그 노래 들으면서 동창들을 추억 하기도 하겠죠. 추억의 매개이자, 감정의 도구인데 특히 음악은 귀로만 듣기 때문에 상상을 더욱 자극해서 자유롭게 감정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Q. 최근에 내가 음악가라서 행복하다고 느끼신 것은 언제인가요?

항상 행복해요. 내가 음악을 안 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기타를 안쳤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겪던 순간에도 기타를 연주하고 있어서, 음악이 있어서 버텨온 것 같아요. 음악이 없으면 살 수 없었겠구나 싶을 때도 있었어요. 예전에 연애할 때 여자친구가 나랑 기타 중에서 뭘 선택할 거냐고 물었는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기타라고 대답했다가 고생한 적이 있어요(웃음) 기타는 제 삶의 중요한 버팀목입니다.

카투사 군 복무 시절 미국 친구들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요. 대체 저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왜 군대를 왔을까 싶을 정도로 음악을 잘 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왜 음악을 안 하고 군대를 택했냐고 물어보면 미국에서 이 정도 실력으로는 뮤지션으로서 성공하기가 힘들다는 거예요. 그 정도 실력이면 한국에서 씬을 평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나는 정말 분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또, 이들을 통해 틀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도 배웠어요. 음악을 접근하는 자세가 달랐죠.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을 배울 때 선배들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정해진 룰 대로 따르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들은 틀 없이 소위 자기 마음대로 음악을 하죠. 그 곳에서 만난 한 친구는 기타를 쳤는데, 어릴 때 기타줄이 하나인 줄 알고 살았었대요. 집에 기타 한 대가 있는데 그 기타에 줄이 한개였다나. 그걸로 몇 년을 연습했대요. 그 친구 연주를 들어보면 독특해요. 정말 잘하죠.

또 한 번은, 지나가다가 너무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들리길래 문을 슥 열고 들어가서 연주하는 모습을 뒤에서 한참 구경했어요. 팝, 재즈, 펑크 이런 다양한 장르의 피아노곡을 자유롭게 너무너무 잘 하더라고요. 연주가 끝나고, 연습을 얼마나 했냐고 물었더니 일주일 됐대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연주를 잘 하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대요. 전에 타악기를 연주했었는데 피아노를 타악기를 치듯 연주했다나.. 그때 깨달은 게 두가지에요. 첫 번째,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두 번째, 음악에 정해진 룰은 없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 ‘왜 안돼?’라는 생각! 뭐든지 마음 가는 대로 해보자. 그때 형성된 기본 마인드 두 가지가 지금까지의 음악 인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죠.

항상 행복해요.
지인들에게 내가 음악을 안 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기타를 안쳤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겪던 순간에도 기타를 연주하고 있어서, 음악이 있어서 버텨온 것 같아요.
음악이 없으면 살 수 없었겠구나 싶을 때도 있었어요.
예전에 연애할 때 여자친구가 나랑 기타 중에서 뭘 선택할 거냐고 물었는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기타라고 대답했다가 고생한 적이 있어요(웃음)
기타는 제 삶의 중요한 버팀목입니다.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8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41 total views,  2 views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