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매거진 [레전드인터뷰] 박남정 | 레전드매거진

박남정

[박남정]

박남정은 80년대와 9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솔로 댄스 가수다.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그의 실력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라 평가받는다. 그는 비단 춤만 잘 추는 댄서가 아니라, MBC 합창단 출신의 가창력을 갖춘 가수로 시원한 가창력을 소유한 실력파 가수이기도 하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박남정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고유한 음색과 특유의 창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를 대표하는 히트곡 ‘널 그리며’를 직접 작사·작곡하였으며, 음정과 화음을 자유자재로 변조해 부르는 등 음악적 감각과 지식을 갖춘 뮤지션으로서의 기량 또한 아주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곱상한 외모와 화려한 댄스 실력으로 80년대와 90년대 소녀 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를 대표하는 여성 가수 ‘김완선’과 함께 80년대 말을 주름잡던 원조 아이돌로 기억되어 있기도 하다. 1988년 ‘아 바람이여’로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으며, 1989년 ‘널 그리며’를 발표하며 대한민국 대표 댄스 가수로 그 입지를 굳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ㄱㄴ춤’이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널 그리며’는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 자리를 탈환하며 박남정은 ‘골든컵’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후속곡 ‘사랑의 불시착’ 역시 가요톱10 골든컵을 수상하며 조용필 이후 한 앨범에서 2곡의 골든컵을 수상한 가수라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이 노래가 더욱 인기를 끈 이유는 바로 이 노래를 박남정 본인이 직접 작사와 작곡을 했다는 점이었다. 이어 그는 ‘비에 스친 날들’에서 지금 들어도 상당히 파격적인 랩이 구사하며 프로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이전에도 1990년 ‘멀리 보이네’에서 파격적인 랩을 선보인 바 있다.      

또한 1980년대 한국에 흑인음악과 클럽 댄스를 전파한 0세대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절 흑인 음악과 흑인 댄스는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새로운 문화였는데, 박남정은 이태원 클럽 등지에서 직접 음악과 댄스 모두를 연마해 이주노, R.ef 박철우 등과 함께 이 새로운 트렌드의 한국 정착을 주도했다. 이들의 뒤를 따라 1세대 멤버가 현진영, 양현석, 강원래, 구준엽, 유영진 등인데 이들과 함께 최신 트렌드의 정보를 공유하거나 함께 익혀나가며 그 틀을 완성해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정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대한민국 대표 댄스 가수 박남정을 만나 춤과 음악, 그리고 성공한 가수로 살아온 그의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봤다.      

[가수 박남정]

레전드 매거진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종이 매거진 인터뷰를 통해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가수 박남정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선 이렇게 종이 매거진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너무나 반가운 마음을 먼저 전해야 할 것 같아요. 온라인 뉴스라는 디지털적인 기계화된 정보들 사이에서 우리 ‘레전드 매거진’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멋진 종이 잡지로 승승장구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요즘 방송일로 젊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기회가 많은데 이 친구들을 볼 때면 저의 데뷔 시절 풋풋한 저의 모습이 많이 떠오르죠. 그리고 요즘 친구들은 정말 외모도 남다르고, 또 거기에 음악적인 실력까지 갖춘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저희 때만 해도 춤추는 가수는 춤추는 가수, 노래하는 가수는 노래하는 가수 이렇게 구분을 지어야 할 만큼 댄스와 가창력 모두 갖춘 가수를 찾기 힘든 시대였거든요.     

이는 아무래도 수년간 혹독한 트레이닝 과정을 거치며 완벽히 연마된 사람에게만 무대에 설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시스템이 가능케 한 거라 생각해요. 저희 때는 춤이 좋으면 혼자 춤 연습하고, 노래가 좋으면 혼자 노래 연습을 했어요. 여러 명이 함께 연습한다고 해도 다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고군분투하는 정도였죠. (웃음)     

그래서 솔직히 지금 친구들 보면 부러운 면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완벽히 연마된 실력을 갖춘 아이돌은 또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의상과 헤어, 안무 등이 뒷받침을 해주죠.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춘 댄서도 음악에 맞는 안무를 짠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또 관중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만큼 독특하고 신선해야 하잖아요.     

그런 외적인 부분을 전문가들이 채워줄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는 것도 아마 K-POP이 전 세계에서 인기몰이를 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합니다. 또 하나 이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뮤지션으로서의 ‘마인드’라 할 수 있는데요, 제가 오랜 시간 봐온 바로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속된 말로 ‘겉멋’ 들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일단 너무 착하고 성실하며 자기가 뭘 원하는지, 그리고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죠.     

얼떨결에 무대에 올라 벌벌 떨며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했던 우리 세대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죠. 그런 부분들이 가장 눈에 띄어요. 우리 기성세대는 ‘요즘 노래는 시끄럽기만 하고 우리 때는 참 감성적이었어’라는 생각은 그저 ‘자기 때가 최고였다’라 우겨대는 노땅 마인드일 수밖에 없죠. 그들을 비판하기 전에 한번 제대로 그들의 음악을 들어보고 그들의 춤을 보세요. 아마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이 보일 거라 제가 확신합니다.      

[트렌드의 변화]

이 문화 트렌드의 변화라는 게 그렇잖아요, 클래식이야 500년이 지나도 똑같이 좋아하지만 대중음악은 그럴 수가 없어요. 2~3년만 지나도 올드한 음악이 되고 이 올드한 것이 클래식이 가진 고전적인 맛을 낼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도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감동하지만 2000년대 초반 가요만 들어도 그런 감동이 없다라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인 거 같아요.     

게다가 80년대 90년대 음악을 들으면 또 뭔가 다른 추억의 감동을 느낄 수 있잖아요. 요즘 노래에는 이런 추억이 없다 보니 우리 기성세대가 감흥을 못 느끼죠. 그런데 2019년 음악을 2039년에 들으면 어떨까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추억의 감성을 충분히 되살려낼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하는 쪽입니다. 그저 우리의 추억이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추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지금 세대에 유행하는 음악을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조금은 순수하고 깨끗하며, 또 신선하고 열정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춤도 그냥 추는 게 아니에요. 그 춤 안에 메시지와 스토리가 담겨있어요. 저희 때는 제가 부르는 노래 안무를 제가 만들었어요. 물론 가사의 내용을 전달은 할 수 있었겠지만 메시지나 스토리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죠. 요즘은 안무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프로 댄서들이 그런 일들을 가능케하죠. 한 편의 뮤지컬 같다고 해야 할까요?      

[박남정, 춤, 그리고 노래]

다시 제 얘기로 돌아와서 (웃음) 사실 제 얘기보다는 요즘 친구들의 얘기를 너무 길게 한 거 같아요. 그런데 저는 춤을 추고 노래했던 기성세대의 입장으로 이런 부분들을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왜냐면 우리 기성세대가 다 옳은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싫다고 비하하고 배척하고 억누르기보다는 그들이 진정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갖추었는지, 뭘 얼마나 잘하는지 등은 한 번쯤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아이고, 이제 정말로 다시 제 얘기로 돌아올게요. (웃음) 제 얘기를 하려면 일단 춤과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요, 많이들 여쭤보세요. 어떤 게 먼 저였냐고. 저는 30년 이상 주저 없이 대답하는 게 ‘수저가 먼저냐 젓가락이 먼저냐’를 논하는 것과 같다라 말씀드리죠. 저도 지금 잠깐 다시 생각을 해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노래가 먼저인 거 같아요. (웃음) 농담이고요, 아무래도 가수이다 보니 음악과 노래의 비중이 더 컸었고, 그 음악을 완벽히 표현해내기 위한 안무를 짜는 순서다 보니 노래가 먼저라 생각 드는 거 같아요.,      

요즘은 내가 노래 제목이나 가수 이름만 알면 3초 만에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시대잖아요. 30년 전에는 정말 지금으로 따지면 북한이라고 그래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어요. 뭘 찾아 들을 정보도 없었고, 또 그 정보를 어렵사리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 음악을 찾아 듣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미로를 헤매고 헤매는 일들의 반복이었죠.      

[트렌드의 오아시스, 이태원]

AFKN이나 한국 TV에서 기껏해야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 같이 보편화된 스타의 뮤직 비디오를 가끔 틀어주는 게 전부였어요. 그러니 음악을 접하는 방식 자체도 완벽히 수동적이었어요. TV나 라디오에 나오지 않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문화예술의 불모지였죠. 그런 불모지에서 유일한 오아시스 같은 곳이 바로 이태원이었습니다. 이태원에 가면 클럽들이 많았는데 흑인들도 많고 자연히 흑인 음악과 흑인 문화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장소가 많았어요.      

이태원 길거리만 걸어도 당시 한국에서는 존재치 않았던 ‘힙합’이나 ‘랩’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었죠. 길거리에서 스트리트 댄스를 선보이는 젊은 흑인 청년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태원에 있는 레코드 방에 가면 정말 희귀한 음악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었어요. 그 레코드 방에서 LP에 있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팔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걸 사서 음악을 들었어요. 그게 보통 비싼 게 아니었죠. LP의 경우 ‘빽판’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도 당시로서는 꽤 비싼 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음악은 그렇다 치고 춤이 문제였어요. 음악은 비싼 돈이라도 주고 사서 들을 기회라도 있는데 춤은 배우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떻게 배우는지, 누구에게 가르쳐달라 해야 하는지 조차도 막막했죠. 우리끼리 모여 춤 연습하려고 해도 지금처럼 연습실이 있던 것도 아니니 춤을 연습하거나 배울 길이 없었죠. 그렇게 찾아낸 게 바로 이태원이나 외곽에 있던 나이트클럽이었어요.      

동네 선후배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아 어렵사리 부탁들 해서 영업시간이 아닐 때 테이블을 치우고 그 공간에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도 허락이 안되면 지하철 플랫폼 주변에 반들반들한 곳을 찾아가 스트리트 댄스를 하며 춤을 연습하기도 했구요. 당시 저랑 함께 춤추던 친구들이 이주노나 R.ef 박철우 같은 친구들이었구요. 저희 바로 아래 동생들이 양현석,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같은 친구들이죠.     

그렇게 우리는 춤으로 이태원을 평정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작은 무대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이태원의 모든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있던 거예요.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우리가 안 간 데가 어딘가 찾다 찾다 보니 우리가 안 간 데가 없는 거예요. (웃음) 그때 우리 팀 이름이 ‘엑스레이’였는데 그렇게 이태원에 입성해 모든 클럽을 평정하게 됐죠. 정말 운 좋게 우리 멤버들 중에 체대 출신 친구들이 있었는데 비보잉이 기가 막혔거든요. 거기에 제가 로봇 춤을 추니 구색이 딱 맞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혔어요. 그때 당시가 86년인가 87년인가 그때일 거예요.      

[박남정, 가수 되다]

제가 가수로 데뷔하기 1~2년 전까지 그러고 다녔던 거죠. 당시 이태원은 ‘쇼’의 성지였어요. 우리는 하루에 5~6 군데를 오가며 무대에 올랐고요. 저희뿐만이 아니고 밤이 되면 이태원에는 일반 사람들보다 쇼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처럼 하루에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느라 바쁘게 뛰어다니는 각설이들, 그리고 비보이 한다고 머리에 바가지 쓰고 뛰어다니는 애들, 또 그 와중에 싸움 나면 다 함께 서서 싸움 구경하고 정말 가관이었어요. (웃음)     

아무튼 그때가 이태원 최고의 전성기였어요. 사람도 많았고, 쇼도 많았고, 또 새로운 트렌드로 넘쳐나는 그런 곳이었죠.  그렇게 댄서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편으로 저는 음악 밴드를 조직해 밴드 생활도 함께 했어요. 밴드 활동으로 음악적 감각을 키우며 저는 개인적으로 음악 경연대회나 페스티벌 콘테스트 이런 행사에 참가했어요.     

당시에는 오디션이나 이런 시스템이 없었으니 제가 가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가요제 참가하는 것 정도였어요. 이래저래 가수가 될 길을 모색하던 어느 날 우연히 한 행사에서 앙드레김 선생님을 만났어요. 선생님께서는 예전 다른 무대에서 저희를 본 적 있으시다며 너무 반갑게 인사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앙드레김 패션쇼에 와서 한번 공연해보면 어떻냐 제안해주셨고 저희는 그렇게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공연을 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 행사에 조용필 사무실 전무님이 자리하고 계셨어요. 전무님이 ‘나랑 같이 음악 한번 해보자’라 제안해주셨고 그때부터 저희는 조용필 사무실에 출근하다시피 매일 들락거리며 용필이 형님 만나 인사도 드리고 그랬어요. 그런데 정작 데뷔에는 진전이 없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조용필 사무실에서 저희를 키우려던 게 아니라, 이 전무님이 회사를 나와 개인적으로 우리를 키우려 했던 거더라구요. 그래서 그 기회는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죠.     

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내가 어떻게 하면 가수가 될 수 있을까 길을 찾아 헤매고 다녔어요. 그러다 우연히 신문에서 ‘MBC 무용단’ 단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고, 여기에 가면 가수로서의 길이 보일 거라 확신하고 오디션에 지원했습니다. 오디션 때 저의 춤을 본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뜨거웠어요. 무려 앙코르까지 선보였어요. 오디션에서 (웃음)     

하지만 저는 그 오디션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어요. 이유는 춤을 잘 추기는 한데 방송국에서 필요한 춤은 아니라 하더군요. 그냥 오디션 현장에서 반응만 좋았던 거였죠. 그런데 ‘MBC 합창단에서도 오디션이 있으니 노래할 줄 알면 거기 한번 응시해 봐라’ 하시는 거예요. 저는 찬반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무턱대고 응시했는데 웬걸? 거기에 합격을 한 거예요. 그것도 수석으로!     

저는 ‘3개월만 딱 버티면서 가수의 길을 찾자’라는 생각으로 3개월을 버텨냈는데 아무 길을 찾지 못했어요. 3개월이 지나면 수습이 끝나고 정단원이 되는 거였죠. 그렇게 되면 내 마음대로 나오는 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여러 가지 제약된 삶을 살아야만 했어요. 저는 과감하게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얘기를 하러 가기 직전 한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한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합창단을 나와 기획사에서 음반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획사와 함께 준비해 1988년 저의 1집 앨범이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됩니다.      

[스타 박남정]

사실 기획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오랜 시간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획사를 만나고 나서 가구사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어요. 그 순식간에 일이 벌어지다 보니 저는 지난 세월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얘기죠. 하물며 저의 재능을 인정해준 상장과 트로피, 골든컵 같은 기념비적인 것들도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철없던 나이에 이른바 ‘스타’라는 무거운 완장을 차게 된 거죠.     

이제 나는 ‘스타’가 되었으니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나 박남정이 앨범만 내면 사람들은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도 내가 죽는 그날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론으로 저 스스로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버립니다. 정말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될 것만 같았어요. 그냥 그런 상상만 한 게 아니라 대부분의 일이 제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고 있기도 했죠.     

철없던 저는 또 다른 일탈을 꿈꾸게 됩니다. 기획사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매니저와의 마찰과 폭발적인 스케줄 등으로 언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런 상황은 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어요. 거기다 한술 더 떠 친구들도 못 만나고, 어디 식당에 가서 편하게 밥 한번 못 먹고, 이른바 연예인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버겁게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한심한 생각들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그걸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런 스트레스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그럴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제 계약기간이 4년이었는데 저는 회사에 계약이 만료되면 재계약하지 않을 거다 으름장을 놓고 진짜로 딱 4년만 활동하고 연예계를 떠났습니다. 당시 저는 솔직히 다시는 이런 일 안 한다라는 각오로 그만뒀죠. 그렇게 ‘스타’라는 직업을 그만둔 저는 한동안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친구들도 만나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제가 4년이란 세월 동안 꿈꾸었던 ‘일탈’을 마음껏 누렸죠. 그런 마음의 휴식도 잠시, 저는 점점 빈털터리가 되어가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저작권 시스템이 지금처럼 잘 되어 있지도 않았기에 제가 네 노래를 만든 것에 대한 어떠한 혜택도 누릴 수가 없었어요. 아예 저작권이란 개념조차 애매모호할 때였으니까요.      

그러다 제 딸을 출산하면서 ‘이제 가장으로 뭔가 다시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기획사가 아닌 저 스스로 혼자 5집을 준비해 발매하게 됩니다. 예전 기획사가 트로트 기획사다 보니 댄스 음악에 걸맞은 사운드가 안 나오는 게 항상 불만이었거든요. 저는 그런 부분도 멋지게 만들어내기 위해 혼자 컴퓨터 음악을 공부하며 곡을 만들어 갔죠.     

[다시, 스타를 꿈꾸다]

그렇게 오랫동안 힘겹게 준비해 5집을 발표한 저는 ‘비에 스친 날들’이란 곡을 타이틀로 앞세워 활동을 재개합니다. 하지만 성과는 제 기대 이하였어요. 한마디로 그냥 망한 거죠. 춤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있었는데 대중들에게 까지 사랑받지는 못하고 그렇게 활동은 마무리되었죠. 나중에 인순이 선배님이 ‘비에 스친 날들’을 리메이크하셨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노래가 인순이 선배님 노래인 줄 아는 거예요. (웃음)     

제 가장 큰 실수는 음악으로만 승부를 보려 했던 거예요. 100% 음악으로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해외 유명 밴드나 그룹 보면 음악으로만 승부하겠다고. 근데 저는 참 멍청하게 정말 음악만 들고 나왔어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죠. 제가 만든 음악을 알릴 마케팅이나 홍보 수단도 준비해놓지 않았던 거예요. ‘나 박남정이 나오면 여기저기서 불러주고 난리가 날거다’라는 착각에 빠져있던 거였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춤만 추며 떠돌아다니다 보니 정작 사업이나 비즈니스적인 기본적인 지식이 아예 없었어요. 아, 이래서 다들 기획사와 함께 일하는구나 라는 한탄만 하게 됐죠. 가끔 연락이 오기는 했지만, 그때는 제가 혼자 의상을 준비해 들고 방송국을 다니는 정도였어요. 제가 직접 제 앨범을 들고 발품을 팔거나 사람들에게 내 노래를 알리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거죠.     

이런 부분을 보완했다 생각하고 6집 ‘멀어지는 너’를 발표했는데 5집보다 더 연락이 없었어요. 순식간에 6집 활동은 마무리되었죠. (웃음) 2004년도 7집 앨범 ‘가지 마’는 그나마 제작자와 함께 작업을 해서인지 방송에 꽤 많이 출연했어요. 1년 정도 활동을 이어갈 수는 있었죠. 그렇게 7집을 끝으로 저는 또 긴 공백 기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2017년 8집 앨범을 냈는데 역시 반응을 크게 얻지는 못하고 사라져 버리게 됐죠.      

이런 시간들을 보내며 그제야 저는 예전의 과오를 하나하나 되짚어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지금 계속 이렇게 안 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어릴 때는 정말 춤이 좋아 춤을 추고, 노래가 좋아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은 먹고살기 위해 춤추고 노래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저를 슬프게 만들기도 했죠. 저는 후배들에게 지금 저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요.     

[마지막 메시지]

지금 ‘스타’라는 커튼에 가려진 너의 미래를 조금은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자주 하곤 해요. 그리고 ‘관리’를 해라 말하고 싶어요. 관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일단 건강이 최우선이고, 또 경제적인 관리,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인맥 관리’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하는 ‘어장 관리’말구요. (웃음) 내가 인사하고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 다라는 걸 잊으면 안돼요. 꼭 도움을 주고 안 주고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 진심을 다해 대하면 언젠가 나에게 ‘복’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가장 우선적으로 잘해줘야 할 사람들이 바로 ‘가족’입니다. 저는 우리 딸들 어릴 때부터 영상을 찍어놓은 게 있는데요, 가끔 와이프랑 싸우거나 아이들이 속상하게 할 때 이 영상들을 보면 기분이 완전히 풀어집니다. 보통 영상은 행복한 순간을 담잖아요. 우리가 뭐 ‘그것이 많이 알고 싶은’ 같은 탐사보도나 시사프로그램 찍는 거 아니잖아요. (웃음) 그 행복한 순간의 담은 영상을 볼 때면 우리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어요. 이거는 정말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행복한 가정을 지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확신합니다. 또 이런 영상을 어머니께 보여드리면 어머니도 행복해하시고요.     

이렇게 영상을 취미처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상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요, 요즘은 사이버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어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평면 디자인 프로그램부터 ‘프리미어’나 ‘애프터 이펙트’ 같은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까지 섭렵 중이죠. 사실 긴 시간 배운 게 아니라서 깊이 있게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이 프로그램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가 저의 목표입니다.      

저는 일단 목표가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개개인이 설정한 목표가 있으실 텐데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져 그 목표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그날까지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 박남정을 위한 아낌없는 응원 부탁드리며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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