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매거진 포크 기타리스트, 이정선 – 레전드매거진

포크 기타리스트, 이정선

1970년, 검열이라는 이름 하에 창작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많은 예술가들이 창작과 검열의 줄타기를 하던 시대 속에서
1974년 홀로 제작한 음반 <섬소년>을 시작으로 1975년 4인조 포크 그룹 <해바라기>,
1979년 3인조 포크 록 그룹 <이정선과 풍선>, 1986년 블루스 록 밴드 <신촌블루스>를 거치며
솔로 활동을 비롯한 <이정선 밴드>에 이르기까지.

이정선은 포크계에 큰 영향을 미친 거장으로
포크 – 블루스의 계보를 잇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을 수상하고,
2016년에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기타 교본의 바이블로 불리는 『이정선의 기타교실』의 저자로
대중음악사의 발전을 함께 하며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의 스승으로
대한민국 음악계의 토대를 다지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기타리스트의 대부
포크 기타리스트 이정선

안녕하세요, 이정선 선생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음악이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기타에서 손을 놓지 않다 보니 어느덧 일흔이 되어버린 이정선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동덕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이정선의 기타교실』이라는 책의 저자이고, 현재는 이정선 밴드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습니다.

이정선의 기타교실! 기타의 정석이요, 기타리스트들에겐 바이블 같은 교재란 생각이 드는데, 어떤 계기에서 이 책을 쓰시게 된 건가요?

우리 세대는 기타를 너무 힘들게 배웠어요. 독학은 기본이었고 선생님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자료도 찾기 어려워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어가며 배워야 했죠. 그래서 후배들은 그런 어려움 없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내가 아는 것 만이라도 가르쳐주자는 의미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실 지금 읽어보면 틀린 부분도 많은데, 그 당시엔 그런 것도 없었으니… (웃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고 그 덕에 교재를 계속 쓸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정선의 기타교실』 개정판 작업을 모두 끝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업하며 힘든 점은 없었나요?

네, 아홉 권 모두 완간하는데 3년 가까이 걸린 것 같아요. 판형을 키우고 악보의 오류를 수정하면서 새로운 해설을 넣고 QR코드도 활용하고… 이것저것 신경을 쓰다 보니 오래 걸렸네요. 책을 새로 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어요. 인터넷 활용이 기본이 되어버린 지금 시대에 뒤쳐졌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의 음악들을 가능한 원곡대로 남기고 싶은 제 욕심으로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기타 연주를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이 선 건 언제셨나요?

중학교 때부터 기타를 치긴 했지만 재미있는 놀거리였지 음악으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기타를 좋아했고 늘 음악이 제 곁에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악인의 길로 접어든 거 같아요. 제가 처음으로 포크에 흥미를 갖게 된 건 대학교 2학년 무렵의 일인데, 미국에서 귀국한 한대수 씨가 드라마 센터에서 첫 공연을 했었어요. “아니, 그런데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단 말이에요?” 포크송 라이브란 것을 처음으로 접한 순간이었어요. 가사도 도저히 노래 가사라고 부를 수 없는 시 같은 문장으로 노래를 했어요. 제가 그간 들어왔던 음악 하곤 너무 달라서 굉장히 쇼킹하고 기묘한 경험이었고 새로운 음악에 금세 빠져들게 되었죠.

그러다 국방의 부름을 받아 육군본부 군악대로 입대하게 돼요. 군대에서 달리 할 일도 없고 연습이라는 좋은 구실도 있겠다, 군대에서도 계속 음악을 했었죠. 병장 때의 일로 기억하는데, 대학 후배 김민기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이름으로 듀엣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 도비두가 YMCA에서 주최한 제1회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세노야’를 작곡한 김광희 씨가 하몬드 오르간 세션을 했고 제가 세션으로 베이스를 치게 되며, 제 운명은 한 걸음씩 포크를 향하여 가고 있었죠.

휴가 때마다 관심 있게 동네 레코드 가게에 들리곤 했어요. 어느 날, 가게에 김민기의 솔로 음반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여 휴가 내내 들으며 포크 음악의 매력에 더 깊게 빠져 갔어요. 그러면서 나도 창작을 해보고 싶었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부대에서 습작을 시작했죠.

제대 이후,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어요. 복학까지 남은 기간 동안 돈을 벌어야 했는데 마땅한 재주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을 지켜보니 돈벌이가 될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기타를 가지고 통기타 포크 씬이 있는 명동과 신촌의 음악 카페를 다니면서 활동이랄지 취업을 시작하면서 제 운명은 점점 더 깊게 포크라는 음악 속으로 빠져들어갔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CBS 방송국의 PD인 김진성 씨를 만나게 됐어요. 포크 음악계의 대부같은 분이신데, 그분이 제게 방송 출연을 제안하셨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죠. 또 제게 작곡도 권하셨는데 자작곡을 만들어둔 터라 어렵지 않게 발표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점차 자작곡이 많아지며 [이리저리]라는 앨범을 한 장 내게 되었어요. 그런데 워낙 검열이 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발표하자마자 발매 금지를 당해 버렸고 비공식적인 첫 앨범이 되어버렸죠. “그러니 오기가 생기잖아요. 좋아,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봐?” 그렇게 죽어라 연습해서 다음 해인 1974년 공식적으로 첫 번째 앨범인 [섬소년]을 발표하며 저도 포크 신에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가 되었습니다.

많은 공연을 하신 만큼 남다른 무대에서의 철학이 있을 것 같아요.

철학이라 할 만큼 거창한 건 아니고 공연은 내가 재밌으니까 하는 거예요. 사실 공연을 안 해도 상관없는데 기왕이면 무대에 오르는게 더 재밌잖아요. 전 보통 작은 무대를 좋아하는데 포크나 블루스는 그렇게 거창한 음악이 아니거든요. 무대가 커지면 오히려 쇼가 되어버려요. 숨소리까지 느끼며 다 같이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이즈, 100~150 명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더 작아도 괜찮고. 음악에는 정답이 없는 만큼 일방적으로 난 노래를 할 테니 너흰 내 노래를 들어라 라는 태도는 지양하며 공연하고 있어요. 노래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일이고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한때 관객과 소통하는 연주자를 꿈꾸었는데…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아니야, 꿈만 꿔. 권하고 싶진 않아~. (웃음)

서울대에서 조소를 전공하신 것이 음악 활동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나요?

네, 분명 도움을 주었어요. 조소란 3차원의 공간에 입체로 된 형태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미술인데 스스로 미처 몰랐지만 음악 활동을 하며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 있어요. 제가 만든 음악에 대해 몇몇 평론가 분들이 공간감이 느껴진다는 평을 하곤 했어요. 노래에서 공간감이 느껴진다거나 가사에서도 공간감이 느껴진다고 하기도 했죠. 그래서 저도 제 노래를 분석해봤더니 어떤 공간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어떤 악기들은 소리가 작은데도 음색 때문에 앞으로 튀어나오게끔 들리고 어떤 악기들은 소리가 커도 바닥을 향하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 것 때문에 음악에 차원이 생기는데 무의식적으로 평면이 아닌 3차원의 입체적인 배열의 곡을 쓰던 거였죠. 조소를 전공하며 배운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했고 제 음악이 가진 특징이라 할 수도 있겠죠. 블루스를 하며 색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전까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발전하며 음악도 그 형태가 감상을 위한 것에서 배경을 위한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악이 디지털로 발매되면서부터 그런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 거 같아요. 아날로그 시절의 음악엔 영혼이 있었는데 디지털화되면서 0과 1의 숫자로 나뉘어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음악이 점차 살아있을 여지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디지털 포맷으로 바뀌며 생긴 또 다른 변화는 음역대의 축소인데, mp3는 가청 주파수 이외의 영역을 잘라버렸잖아요. 그런데 우리 귀엔 안 들리지만 분명 그런 음역대도 살아있는 소리거든요. 예민한 친구들은 피부로도 소리를 느낀단 말이에요. 그걸 느낄 여지를 없애버린 거죠. 그러니까 음악이 살아있지를 않고 박제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음악을 들어도 예전만큼 감흥이없는 거죠.

과거의 그림은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을 최고로 여겼으나, 18세기 후반부터 추상화가 등장하며 이젠 백지에 점 하나만 찍어도 예술이라 인정 을 받는 시대로 바뀌었죠. 그림의 개념이 바뀐 거예요. 마찬가지로 음악의 개념도 바뀌어야죠. 과거에는 리듬, 멜로디, 하모니 세 가지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어야 노래로 인정받았어요. 우리에게 친숙한 랩이라는 장르도 초창기에는 노랫말만 있었어요. 그런데 멜로디 없이 계속 가사만 읊조려도 그 안에서 충분히 리듬감을 느낄 수 있었고 결국 노래로 인정을 받은 거죠. 이처럼 음악의 범위가 조금씩 바뀌고 있고 또 바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음색도 지금처럼 실제 악기가 필요한 게 아니라 샘플링만 사용하고 조작해서 컴퓨터로 낼 수 있는 소리만으로 음악을 만드는 거죠. 나중엔 아예 ‘편집 음악’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장르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걸 음악으로 인정하고 안 하고는 대중의 몫이고.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대중성과 예술성이 같이 나아갈 순 없는 걸까요?

참 어려운 문제예요. 아마 영원한 숙제가 아닐까 싶은데… 대중은 계속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사실 대중의 생각은 멈춰있다고 봐야 해요. 자기가 가장 좋았던 순간의 기억에 아티스트를 고정시켜 놓는 거죠. 래리 칼튼(Larry Carlton)의 데뷔곡은 1978년에 발표한 Room 335인데 지금도 대표곡이 Room 335잖아요. 본인은 얼마나 지겹겠어요. 게다가 지금 와서 아무리 똑같이 치려 해도 예전에 치던 그 맛이 살지 않아요. 어느 날 순간적인 느낌을 받아 연주한 것을 지금 와서 아무리 똑같이 하려 해도 느낌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관객은 부드러워지면 왜 이렇게 매가리 없어졌냐, 화려하게 치면 왜 원곡에서 벗어나냐고 할 거란 말이에요. 예 술성이란 건 예술가가 계속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이거든요. 예술가는 머물러 있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느낀 것을 작품으로 보여주 려는 것인데…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겐 낯설기만 한 거죠.

예술성과 대중성의 괴리는 음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 분야에서 전부 겪는 일이에요. 문학이라고 안 그러겠어요. 작가는 앞서갈 수 있지만 대중은 너무 앞서가는 걸 쫓아오지 못해요. 대중은 반걸음만 나가도 어려워해요. 마음은 이미 저만치 가있는데 어디까지 보여주느냐…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늘 갖고 있는 고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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