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T BAKER

쿨 재즈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음악가
BORN TO BE BLUE CHET BAKER

쳇 베이커는 미국의 재즈 음악가로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이다. 불우한 유년기를 겪으며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일까? 그의 음악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이지만 동시에 불안하고 우울하며 우수에 가득 찬 감성을 담고 있다. 그의 불행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그의 음색은 재즈 애호가뿐 아니라 많은 일반인의 가슴을 깊게 뒤흔들었고, 이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어필하게 된다. 또한 할리우드 배우처럼 잘생긴 용모와 반항아라는 명성도 웨스트 코스트 쿨 재즈의 메인을 장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음악적 성공에도 유년기적 기억을 달랠 수 없었는지, 그는 결국 약물에도 수차례 손을 대게 된다. 베이커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음악을 하던 동료들도 약물로 인해 수차례 경찰서를 들락날락 거리며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한다.

1955년에 발매한 〈Chet Baker Sings and Plays〉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지만, 당대 뮤지션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유럽으로 진출하여 〈Chet Baker in Milan〉와 〈Chet Baker and Fifty Italian Strings〉본토보다 더 큰 환대를 받았지만, 금단증상에 시달 리던 끝에 다시 약물에 손을 대어 체포되었고 급기야 추방당하기에 이른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도 그의 인생은 약물과 음악 두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음악을 하기 위해 약에 의존한 것일까, 약을 사기 위해 음악을 판매한 것일까. 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인생이 황혼지에 접어들 때까지 수차례 반복되었다. 천재 뮤지션임에도 마약으로 인해 불행한 결말로 귀결된 삶이지만, 그는 흑인들이 주역이었던 재즈 음악의 계보에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낸 백인 재즈 뮤지션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안녕하세요. 쳇 베이커 님,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는 여러 팬분들에게 안부 인사 부탁합니다.

먼저 절 잊지 않고 여전히 기억해주시는 많은 팬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쳇 베이커입니다.

쳇 베이커 님이 생소하신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애 전반에 걸쳐 여러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먼저 어떤 유년기를 보내셨는지요.

저는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예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제가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금방 따라 부르는 것을 보신 아버지께서 트롬본을 사주신 게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도 기타와 벤조를 연주하는 연주자 셨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역시 음악적 재능을 이어 받았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 제 체구에는 트롬본이 너무 컸기 때문에 결국 트럼펫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 지의 기대와는 달리 크게 흥미를 느끼진 못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별다른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독학을 했기 때문에 뛰어난 실력이 아니었 습니다. 라디오나 음반을 몇 번 들으면 금 새 비슷하게 연주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죠. 더욱이 누군가 던진 돌에 앞니가 부러지는 바람에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연주하는데 핸디캡으로 작용했습니다.

군 복무도 하셨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군대에서도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하셨나요.

처음에는 행정병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만, 너무 싫증이 나는 바람에 군악단의 오디션을 거쳐 음악병으로 보직을 변경하여 군 생활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맹장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불행히도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찰의 검문에 대마초가 발각되어 재판을 통해 징벌성 재징집을 당했고, 다시 군 밴드에서 음악병으로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 군 생활도 악보 초견 시험에서 불합격하는 바람에 징계성 전출 조치를 받았고, 이후 정신 감정에서 부적격 진단을 받아 다신 의병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운 좋게 비밥의 대명사인 찰리 파커와 협연할 수 있었고, 덕분에 신인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멀리건과의 만남을 통해 쿨 재즈 연주자로 자리매김 한 이후 솔로 활동을 통해 전성기를 맞으셨던 거로 압니다.

바리톤 색소포니스트이자 작/편곡자인 멀리건과의 만남을 통해 음악 적으로 더 성숙해지긴 했습니다만, 인간적으로 서로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매번 삐걱거림이 있었지요. 솔로 활동을 통한 성공의 계 기를 저 스스로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멀리건과 결별하고 1954년 초에 기존의 트럼페터 바운더리를 넘어 보컬리스트로서 〈Chet Baker sings〉를 출반 하였습니다. 제 목소리에 대한 대중의 호오는 극명하게 갈렸습니다만… 글쎄요, 상대적으로 여성들에게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기 구가에도 불구하고 흑인 재즈 계에서는 저의 연주를 유약한 재즈라 얕잡아 부르며 달가워하지 않았고, 저는 반박하고 싶어도 따라 할 수 없는 연주를 구사하던 이들에게 열등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 아내 샬레인과의 부부관계도 날로 악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점점 마약에 대한 유혹이 강해지는 시기였습니다.

생에 꽤 오랜 기간 동안 약물로 인해 힘든 시기를 겪으셨지요.

맞습니다. 당시에 뮤지션들 사이에선 의례히 사용되던 것이었고 저도 처음에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음악을 위해, 현실의 고통을 잊고 음악에 몰두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사용이 던 것이 나중에는 약을 사기 위해 음악을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약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많이 무너졌고, 많은 무대와 음악적 기회를 상실했고, 경찰서에도 수차례 드나들게 됩니다. 약을 끊기 위한 노력도 해보았습니다만, 그럴수록 삶이 고되지고 유혹은 더욱 강해져만 갔지요. 연주를 하던 시간을 제외하곤 늘 약에 취해 있던 탓인지 기억이 흐릿 하네요. 하지만 유독 임종을 향해가던 시절이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약에 의해 몸이 많이 망가져 있었던 1987년에는 마지막이란 생각을 가지고 도쿄에서 공연을 치렀죠. 이 기간에는 치료 약인 메타돈만을 사용하였습니다. 덕분에 제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제 나름 명연을 관객들에게 선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삶의 불꽃이 꺼져감을 직감했고 도쿄 공연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꺼지기 전의 불이 가장 밝다는 말이 있듯이 삶의 마지막 시기가 다가올 수록 무언가에 강하게 이끌려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그 불이 꺼지기 직전에 유럽에서 공연을 이어갔으며, 이탈리아에서 저의 마지막 스튜디오 음반이 된 〈Little Girl Blue〉와 〈The Heart of the Ballad〉의 리코딩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1988년 북독일에서는 제 생애 전반에 걸쳐 가장 화려했던 단독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쳤는데 이때의 공연 실황이 제가 남긴 마지막 리코딩이 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당신의 일대기를 다룬 ‘본 투 비 블루’라는 영화가 개봉하여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라니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관람해보고 싶네요. 제목만을 봐서는 저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아주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동명의 제 앨범 수록곡인 Born To Be Blue도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Now all at once it’s you, It’s you forever more”
Chet Baker –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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