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인생 40년의 회고 기타리스트, 엄인호

안녕하세요.
저는 <신촌블루스>의 멤버이며 ‘아쉬움’ ‘골목길’ ‘그대없는 거리’ 등을 작사 작곡한 기타리스트 엄인호입니다. 1979년 그룹 <풍선>으로 데뷔하여 올해로 저의 데뷔 40주년을 맞이하게 된 시점에 레전드매거진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인사드리게 되어 더욱 그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실 분들 중에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구독자 분들을 비롯하여 삶의 긴 여정을 음악을 벗 삼아 묵묵히 견뎌내고 계실 저의 선후배님들과 동료분들도 있으시겠지요. 여러분들이 이 글을 언제 어디서 보게 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무는 하늘 짙푸르게 물든 어스름을 등진 허름한 노천 술집에서 전구 조명을 안주삼아 듣는 친한 선배의 인생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이 글을 읽는 내내 여러분들 모두의 마음속에 작은 위로와 편안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블루스 인생 40년의 회고
기타리스트 엄인호

학창 시절

1952년에 말썽꾸러기 사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감수성이 풍부했던 저는 꿈을 향해 시동을 걸던 청소년기에 찾아온 사회의 혼란과 예술인들에 대한 억압에 때로 방황도 했었지요.

태어나 가장 먼저 좋아한 가수는 <롤링스톤즈>와 <비틀즈>였습니다. 국민학교 때(지금의 초등학교) 종일 AFKN 라디오를 끼고 다니면서 락스타가 되어 세계를 누비는 상상을 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찾은 바닷가에서 당시 가장 유행하던 <트윈 폴리오>의 히트곡 ‘조개껍질 묶어’를 목놓 아 부르던 제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신중현 씨의 라이브 공연을 본 후였습니다.

신중현

고등학교 2학년 때 시민회관에서 신중현 씨의 라이브 콘서트가 열렸어요. 그 전에도 라이브 공연을 몇 번 봤었지만 대학 동아리 밴드 연주 정도였는데 신중현 씨의 라이브 공연은 그전까지 본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음악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저렇게 멋진 거구나, 무대 위에서 사람이 저토록 빛날 수가 있나? 싶어 큰 충격을 받았죠.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관객들을 단숨에 사로잡는 신중현 씨를 보면서 장차 다가올 제 운명을 예감했습니다.

그 뒤로 음악에만 매진하려 했어요. 공부는 뒷전이고 방과 후에는 기타 연습을 하기 바빴죠. 머릿속에는 온통 기타 코드와 새로 들은 LP앨범의 기타 애드리브를 어떻게 하면 더 맛깔나게 카피할 수 있을까? 등의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사정은 녹록지 않았어요. 가족들이 제가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했고, 친형들이 특히 엄하게 대하셨거든요. 정작 둘째형과 셋째형도 음악을 했고, 특히 둘째형은 8군부대에서 연주자 생활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저에게는 공부도 곧잘 하는 녀석이 무슨 음악을 하냐고 만류했죠. 저만은 다른 길을 걷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집에 기타를 메고 깨금발로 몰래 들어가다 형들에게 들켜서 종종 매를 맞기도 했어요.

그래도 연습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밤에도 몰래몰래 연습하고,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3인조 스쿨밴드를 결성해 기타를 연주했어요. 그러다 입시 시즌이 다가왔고, 3인조 밴드를 함께 하던 친구들 중 저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예비고사를 안 보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겠다 했어요. 지금처럼 실용음악학과가 있던 시대가 아니라서 당시 음악을 하려면 연극영화과에 가야 했거든요. 저도 그 친구들과 같이 음악 하고 싶어서 집에는 비밀로 하고 예비고사를 안 봤거든요. 그런데 그게 비밀이 될 리가 있나. 결국 걸려서 크게 혼났죠. 집에서는 재수하라고 했는데, 어린 마음에 씩씩대며 음악으로 성공하겠다고 두고 보라며 보따리 하나 싸서 집을 떠나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부산에 도착해보니 현실이 녹록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죠. 악보도 볼 줄 모르는데다 작곡도 해 본 적이 없으니 협회에서는 저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연주자로 일을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 였어요. 그래서 생계를 위해 다운타운 디제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건 정말 자신 있었거든요. 남들보다 해외 팝과 락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잘 나가는 밴드들 음악을 두루 다 섭렵하고 엘피도 여러 장 갖고 있었죠. 유행하는 대중가요들을 틀면서 중간중간 손님들과 마담 눈치를 봐가면서 제가 좋아하는 락과 팝들을 틀었어요. 아마 부산에서 락을 들려준 다운 타운 디제이는 당시만 해도 제가 거의 최초였을 거예요. 생소한 음악을 트니 다들 놀랐어요.

그러다가 부산역 앞에 위치한 선원들이 자주 찾아오던 텍사스바에서도 디제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찾아오는 손님들이 외국인들이니 제 선곡 을 마음에 들어했어요. 1973년도부터 1978년 까지 주로 부산에 있었지만 때로 진주도 갔다가, 서울도 갔다가, 울산도 갔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디제이 일을 했습니다. 가끔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밴드가 급하게 연주자를 필요로 할 때 제가 빈자리를 채워주면서 그 팀이 안정될 때까지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지냈어요.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음악을 하고, 선원들이 갖고 들어온 마약에 잠시 손을 댄 적도 있 었죠.

첫사랑, 아쉬움

다운타운 디제이 일을 할 때 자주 찾아오던 단골손님이 있었습니다. 멀찌감치서 음악을 듣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면 생긋 웃던 예쁜 소녀였습니다. 마음 깊이 그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음악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당시 이정선 씨가 <해바라기>라는 그룹으로 활동을 하던 중 제가 디제이로 일하던 클럽에 와서 라이브를 했어요. 공연 중간에 함께 음악을 하고 싶은 손님들이라면 누구든지 무대로 자유롭게 나와 함께 어울리고 연주하는 일종의 잼 순서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제 등을 떠밀어 엉겁결에 무대에 나갔어요. 디제이 일을 하며 몰래 연습했던 기교를 능청스럽게 선보이며 기타 솔로를 연주하는 저를 이정선 씨가 눈여겨보셨던 것 같아요. 반나절만 함께 연습하면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그때가 1978년이었죠. 이정선 씨는 저에게 부산에만 있지 말고 서울로 올라와 함께 음악을 하자고 했어요. 좋은 기회였고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여자 친구가 마음에 걸렸어요. 서울로 올라가면 한동안 못 만나게 될 테니까. 몇 날 며칠을 밤잠을 설치다 떠나기 전에 고백을 하고 가려고 했어요. 함께 바닷가를 찾아 담담히 저의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나도 너를 좋아하지만, 너는 너무 무절제하게 살아간다. 내일이 없는 사람 같다. 감각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고. 음악을 더 열심히 해서 좋은 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난생처음 이성에게 건넨 진지한 고백에 돌아온 충고는 저에게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돌아보니 그 친구 말이 모두 맞더라고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가기 전에 내가 뭐 하나라도 보여주자 싶어 집에 돌아가 그 길로 반나절만에 세곡을 만들었습니다. 곡 하나하나에 저의 진심과 그 친구에 대한 저의 애틋한 마음을 담았어요. 그중 한곡이 후에 많이 알려진 신촌블루스 1집 수록곡 ‘아쉬움’입니다.

다음날 여자 친구의 친구가 살던 하숙집에서 만나 전날 만들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노래들을 들려줬어요. 누구 노래인지는 말 안 하고 무심히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듣더니 한 번만 더 들려달라 하더라고요. 들려줬어요. 여러 번 들려줬는데, 펑펑 울더라고요. 울면서 날 데리고 어디라도 도망가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친구에게 카세트테이프를 건네주며 내가 이제 서울로 가서 열심히 음악을 하고, 1년 뒤에 성공해서 부산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한 뒤 그 친구를 부산에 남겨두고 서울행 심야버스에 탑승했습니다.

1979년 1월에 이정선 씨를 통해 이광조 씨를 소개받아 <풍선>이라는 팀을 결성했어요. 한창 앨범을 발매하고 활동을 이어가던 중 달력으로 표시해두었던 1년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약속대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블랙 테트라>, <심 수봉>, <활주로> 등 당시 가장 유명하고 잘 나가 던 대중음악가들과 함께 부산시민회관으로 향했죠.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객석을 두리번거렸는데, 그 친구가 보이지 않았어요. 공연이 총 2회였는데 내내 보이지 않다가 2회 때 저에게 인사를 하러 대기실에 찾아온 부산 친구들에게 그 친구의 행방을 물었어요. 그런데 제가 음악을 하러 서울로 간 1년 사이에 시집을 갔다더라고요.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1년 전 저에게 나를 데리고 도망가라고 했던 마지막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죠. 이미 부모님들 양가간에 약속된 혼인이 있었을 거예요.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공연을 마친 뒤 밤새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있다가 다음날 아침 서울로 곧장 올라왔습니다.

반년쯤 뒤 ‘이광조’씨가 지구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으면서 팀 <풍선>은 해체되었어요. 돌아보면 팀도 해체되었고, 저의 첫사랑도 그렇게 끝나버렸네요. 그래도 함께 거닐던 바닷가와 다운 타운 디제이를 하면서 쌓았던 그 친구와의 추억들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때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글쎄요, ‘아쉬움’이라는 곡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간 발매하신 앨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앨범은 무엇인가요?

히트곡이 가장 많은 2집 앨범 <황혼>이죠. ‘골목길’ ‘환상’ ‘황혼’ 다 2집 수록곡이니까. ‘골목길’ 보컬을 故김현식 씨가 하면서 본인 앨범도 홍보할 겸 함께 투어도 다녔어요. 워낙 친분이 두터웠으니 좋은 추억도 많고 2집 앨범 떠올리면 현식이 생각도 많이 나서 더 애착이 많이 가죠. <황혼>에는 신촌블루스의 혼이 담겨 있어요. 1988년에 탄생한 신촌블루스가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음악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건 2집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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