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손가락 이두헌

[다섯손가락]

그룹 ‘다섯손가락’ 1집 앨범(1985)에 수록곡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은 당시 남자들이 장미꽃을 사느라 꽃집 앞에 줄을 서게 만드는 새로운 풍속도를 창조해냈다. 또 1집에 함께 실린 ‘새벽기차’는 ‘희미한 어둠을 뚫고 떠나는 새벽기차’에 몸을 싣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청춘의 상징으로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다섯손가락’은 단순히 음악을 하는 그룹이 아닌 당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트렌드 메이커’다. 차분한 포크록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난 대학생 밴드 ‘다섯손가락’은 대한민국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지금은 대학교에서 ‘비틀스’를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 중인 다섯손가락의 기타리스트 ‘이두헌’을 만나 그가 음악과 함께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눠봤다.

[이두헌]

레전드 매거진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섯손가락 기타리스트 이두헌입니다. 이렇게 여러분께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너무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언 20여 년 대학에서 학생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하다가 이렇게 인터뷰 자리에 앉으니 더 쑥스럽기는 하네요. 제가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떻게 보면 강의를 하는 것보다 더 값진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레기도 합니다.

제가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었나 말씀을 드리려면 먼저 저의 가족과 가정환경을 말씀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저희 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 아들 셋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할머니와 사 남매는 북에 남겨둔 이산가족이 된 채 1.4 후퇴 때 내려오셨죠. 1.4 후퇴 때 내려오셨다는 것은 북에 그만큼 지켜내야 할 기두권을 가지고 계셨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함께 남으로 내려오신 아버지는 더 이상 북에 있을 때만큼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충청도 출신의 어머니와 연애해 결혼하시면서 더욱 강인하게 생계를 위해 헌신하셨죠. 제 기억으로도 정말 피나게 고생하시며 우리를 키우셨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헌신으로 저희 가족은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저의 어린 시절에 어려웠던 기억은 갖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강인한 아버지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께서 하모니카를 불 때 그 부드러움을 느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신 것은 아니지만 음악을 참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하모니카를 연주하거나, 음악 감상하시는 것을 무척 즐기셨습니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더불어 어머니께서는 문학을 좋아하셔서 저희는 항상 책을 읽으며 성장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음악과 문학 모든 것을 즐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죠. 그 어린 시절이 지금 제가 작곡을 하고 가사를 쓰게 된 바탕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조금씩 커 갈 때 아버지는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녹음해 저에게 선물해 주시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한 대수의 ‘바람과 나’. 그리고 김민기, 김정호의 노래들을 즐겨 들었습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를 따라 청계천에 갔는데, 우연히 들른 음반가게에서 아버지가 LP 하나를 골라보라 하셔서 무심코 고른 앨범이 밥 딜런 ‘밥 딜런’의 ‘Highway 61 Revisited’였습니다.

이 음반을 계기로 저는 포크록이라는 장르에 흠뻑 매료되었고, 지금 제가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알고 있던 저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바로 저희 사촌누나가 대학 입시를 위해 저희 집에 머물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누나는 서울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려 했는지 클래식 기타를 하나 가지고 왔어요.

공부하다가도 틈틈이 기타를 연주하는 누나의 모습에 매료되어 저도 어깨너머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꽤 빠르게 기타 연주를 마스터했고, 제가 즐겨 듣던 음악을 기타로 연주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조금 숙련되고 나니 더 전문적으로 기타를 배우고 싶어 친구들과 기타 학원을 다니며 기타에 빠져 살기도 했죠.

중학교 2학년 때 ‘지미 핸드릭스’와 ‘에릭 크립튼’을 들으며 일렉트릭 기타에 다시 한번 빠지게 됩니다. 제가 배우던 클래식 기타에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일렉트릭 기타의 소리와 연주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때 저희 집 앞 음반가게 형이 중앙대 ‘블루 드래곤’ 드러머의 친형이었고 그 형의 소개로 블루드래곤 기타 리스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기타리스트가 바로 ‘김성호’였습니다.

그렇게 김성호 형님을 알게 되어 일주일에 서너 번 일렉트릭 기타의 연주법, 작곡과 악보 보는 법 등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배웠습니다. 1년 정도 배우고 김성호 형님이 군대를 가게 되면서 저는 친구들과 학교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게 됩니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보니 중앙대 블루드래곤 연습실을 드나들며 연습을 하게 되었고 중앙대 형들이 아름아름 아는 친구들을 소개해주며 ’다섯손가락‘이라는 팀이 거의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데뷔는 대학 진학 후 했지만 다섯손가락이라는 팀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만들어졌던 것이었죠.

[이두헌, 그리고 다섯손가락]

그렇게 우리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상도동 기름집 지하에 연습실을 마련해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연습했습니다. 어느 날 서울음반 강인중 문예부장이 당대 최고의 팜 칼럼니스트분들을 모시고 직접 우리 연습실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분들 앞에서 우리의 연주를 들려드릴 영광의 기회가 찾아왔고 혼신을 다해 우리 실력을 보여드렸습니다.

팝 칼럼니스트분들은 강인중 부장에게 ‘이 친구들 음반 내도 되겠다’라 얘기했고, 그렇게 저희 다섯손가락은 서울음반 전속 1호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서울음반은 시사영어사의 자회사로 영어, 일본어 등 어학 테이프를 판매하던 회사였는데, 전속 가수 1호 밴드인 저희가 1집, 2집 각각 65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우리 다섯손가락 이후 서울음반은 ‘명반’ 반열에 오른 수많은 앨범을 발매하며 대한민국 대표 음반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저희 ‘다섯손가락’에 가장 큰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멤버 모두 군대를 안 다녀왔던 것입니다. 이 군대라는 문제 때문에 어차피 시작부터 깨어질 수밖에 없던 구조였을 수도 있죠. 1986년도 ‘KBS 가요대상’에서 록그룹 부문 대상을 수상하던 그날, 멤버 임형순이 솔로 선언을 하며 자연스럽게 팀은 해체가 되었고, 저는 그동안 써놓았던 자작곡을 모아 솔로였지만 앨범 이름은 ‘다섯손가락 3집’이라 붙여 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두헌, 그리고 MIDI]

그렇게 음악 활동을 하던 저에게 정말 새로운 음악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컴퓨터 음악’입니다. 가수 ‘이장희’ 선생님의 동생 ‘이승희’씨가 미디 1세대라면, 저는 아마 1.5세대 정도 될 거 같아요. 상당히 초창기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 작업을 했습니다. 아타리 컴퓨터와 EMU 등의 장비를 쓰며, 플로피디스크를 100장 넘게 들고 다니며 작업을 했습니다. 김건모의 ‘첫인상’ 외 하나하나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곡들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장비만 해도 차 한 대를 꽉 채울 정도로 지금은 상상을 할 수도 없는 규모였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고생을 해서였는지 정말 음악 같은 음악이 나왔던 시절이라 생각해요. 컴퓨터 음악이었지만 프로그래밍에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컴퓨터 음악이라는 신세계에 눈을 뜬 저는 또다시 인간 이두헌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순간 이런 식으로 음악을 하다가는 오래 못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죠. 그런 생각을 하니 두렵기도 했습니다. 감성만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계가 다다랐다는 것을 직감했고,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렇게 30이 되던 해, 저는 한국에서의 모든 음악 생활을 과감히 접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두헌, 그리고 미국]

원래는 딱 1년 정도만 있으면서 신문물 습득 정도로만 생각을 하고 떠났죠. 그러다 보니 마음이 그렇게 무겁지도 않았습니다. 제 기타도 한국에 놔두고 올 정도면 이미 후다닥 귀국할 요령으로 떠난 유학이었죠. (웃음) 그런데 제 생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무대를 보게 됩니다.

제가 입학한 버클리 음대 기타 학과 교수님 6명이 협주하는 리사이틀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저는 그 무대를 보면서 제가 애초 유학길에 오르던 취지가 오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내는 분들이 갖고있는 음악적 감각과 지식을 얻으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 직감했고, 저는 일단 한국으로 전화해 제 기타를 소포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버클리 음대와 USC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저는 USC ‘조 디오리오’(Joe Diorio)라는 세계 최고의 재즈 기타리스트에게 개인 교습을 2년간 받았습니다. 저는 그분께 단순히 음악과 기타만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음악인은 어떤 성품을 갖춰야 하는지, 그리고 음악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몸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보며 나도 나중에 꼭 음악만 할게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했죠. 그분을 계기로 아마 제가 20년 넘게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두헌 교수]

2000년 한국에 귀국해 저는 ‘이매진’이라는 앨범을 발표합니다. 펑키 재즈, 라틴 재즈,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담아냈죠. 이 앨범을 계기로 저는 본격적인 솔로 아티스트의 길을 가려했지만, 현실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저의 음악 인생을 위해 서 간택한 유학이었는데, 그 유학이라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죠. 또 기존의 유학파 선배들의 텃세도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렇게 음악의 길에 다시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서 경희대학교 교수 요청을 받았고, 저도 마음속에 그려왔던 일이라 흔쾌히 응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 음악 학과, 그리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비, 윤계상, 김태우, 박지윤, 박효신 등이 제자이기도 하죠. 저는 학생들에게 항상 하는 얘기는 것이 “너의 것을 해라”입니다. 아무리 많은 음악을 알고 완벽히 연주할 줄 알아도 너 자신의 음악이 없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강조하죠.

“조용필의 노래 3개만 얘기해봐라”라고 질문을 던지면 여기저기서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여행을 떠나요’ 등등 수많은 노래 제목이 튀어나옵니다. 저는 바로 그런 가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반대로 모 가수의 이름을 말하면 1개의 노래 =제목도 가물가물거리는 가수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히트곡이 많아야 가수로 성공한 것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대중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인지도를 구축하고 ‘나만의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두헌, 그리고 비틀스]

저는 ‘나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예로 ‘비틀스’를 자주 거론합니다. 비틀스는 빌보드 차트에서 가장 많은 1위를 남겼고, 음반 판매 역시 지금까지 1위이며, 또 저작권료 수익도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전설적인 그룹입니다. 저는 4~5년 전부터 비틀스의 존재를 학생들에게 알리는 강의를 진행했고, 저의 강의를 사랑해주는 학생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이번 학기부터 ‘비틀스 클래스’가 1년 과정으로 학교 공식 승인을 받아 개설되었습니다.

혹자는 제가 음악 하는 사람이니 자기가 좋아하는 `비틀스`를 그저 학생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비틀스는 세계 1등 가수이며, 50년 넘게 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들을 배워 한국 음악이 세계 1등을 할 수 있도록 벤치마킹 하자는 취지입니다.

이 수업의 참여도는 저 역시 놀랄 수준입니다. 학생들은 ‘비틀스’의 작곡기법, 연주력, 가사, 하모니 하나하나 분석해 나갈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죠. 이론 1시간 반, 연주 1시간 반 이렇게 3시간 일정으로 진행되는 수업인데 아직까지 결석생이 단 한 명도 없이 참여도가 100%죠. 이런 수업을 학생들이 고대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저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일단 저질러라. 잘하려고 하지 말고 많이 실패하는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비틀스가 50년 넘게 지속되는 것 역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라 알려주죠. 비틀스는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시도하고 부딪치며 실험과 도전을 이어나간 그룹입니다. 우리 학생들도 이런 정신을 함양해 더욱 멋진 음악가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죠.

[마지막 메시지]

제가 학생들을 가르친지도 어언 20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막 교수가 되던 2000년 당시 학생과 지금 2019년도 학생들의 상황을 보면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음악 시장은 확대되고 저변은 끊임없이 성장하는데 비해 학생들이 사회로 진출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죠. 2000년대 학생들은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실용음악과가 거의 신설학과였기 때문에 그만큼 주목도 받았고 또 졸업 후 취업이나 데뷔의 길이 그만큼 넓었습니다.

일단 입학한 학생들은 다른 걱정보다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 생각할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틀립니다. 지금 학생들을 우울해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 이유는 실용음악과를 졸업해도 예전처럼 다양한 분야로 사회에 진출할 길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때문에 음악적 깊이보다는 현실을 걱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죠. 예술학교도 하나의 학과이기 때문에 당연히 취업률을 따지게 됩니다.

취업률이 낮은 학과는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죠. ‘실용음악’이란 순수한 문화예술 전공을 취업의 잣대로 평가해 존폐를 결정하는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입장으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대학을 졸업하는 것보다 연습생으로 4년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얘기가 오고 갑니다. 또 20년 전에는 졸업하면 교수의 길을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 길마저 포화상태라 꿈꾸기 힘들어진 거죠. 20년 전 학생들이 보여준 의욕적인 모습은 사실 요즘 학생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포부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최근 저만의 무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커피숍과 무대가 공존하는 문화 공간으로 9월경에 오픈 예정입니다. 저는 애초에 이 공간을 제가 평생 음악을 할 수 있는 무대로만 생각했는데, 이 무대를 우리 학생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소통의 장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는 유능한 인재들에게 이 무대를 언제든지 내주고 그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 역시 교수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 아이들에게 ‘비틀스 클래스’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육 과정을 제시했듯이, 인재들이 성장할 수 있는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그런 교수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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