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남, 스타쉐프

1979년,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 새벽, 소년 김후남은 하얗게 눈이 쌓인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부모님이 주무시고 방문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나서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다. 꿈을 향한 그의 질주가 시작된 날이었다.

소년 김후남은 전남 무안을 벗어나 ‘서울’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에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다짐 하나만 가진채 무안터미널로 전력 질주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그날은 서울에서 오는 버스도 거북이걸음이었다. 제시간에 오지 않는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속은 타들어갔다. 혹여 아버지가 나의 부재를 알아채시고 터미널로 오실까 하는 두려움에 터미널 건물 구석에 몸을 숨기고 숨죽여 서울행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만에 터미널에 들어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고 버스가 출발하자 소년 김후남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정신없이 내달린 탓에 지친 몸과 마음을 좌석에 구겨 넣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하염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 한겨울 새벽의 질주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는 시골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싫다기보다는 답답했다. 이 작은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그의 꿈은 너무나 거대했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무안에 새로 들어서는 고등학교 진학이 확정된 상태였기에 그의 답답함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당시만 해도 무안이라는 곳은 시골 중 시골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중 반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생업을 도왔고, 나머지 절반은 중학교로 진학했다. 그 중학생들이 졸업을 할 때가 되면 또 절반은 부모님의 생업을 돕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운 좋게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목포나 광주 등 대도시로 떠날 기회가 주어졌다.

소년 김후남도 비록 목포나 광주지만 그래도 무안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곧 올 거라는 기대감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었다. 하지만 무안이라는 시골에 고등학교가 새롭게 들어섰고, 김후남의 아버지는 여기서 고등학교 다니며 집안일도 도우며 지내라 말씀하셨다.

소년 김후남이 간직하고 있었던 대도시로의 탈출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식을 며칠 앞두었던 눈 내리던 어느 날, 소년 김후남은 도발적 질주를 감행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 가출이었다.

그가 사라져 버린 집안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어머니가 김후남의 가출을 도왔다 오해하시고 어머니와의 갈등도 극에 다다랐다.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은 김후남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알아도 모른 척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버스는 김후남을 안전하게 서울에 데려다주었고, 그는 성수동 공장에서 일하던 형을 찾아갔다.

일단 서울이라는 곳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기에, 그는 성수동의 한 피혁 공장에 취직했지만 오래 견뎌내질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른 공장에 들어가도 쉽사리 버텨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시간을 허비했다. 아무래도 공장일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한 공장에서 ‘상환’이라는 일을 시작했다. ‘상환’은 공장에서 문서 수발 등 잔심부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공장의 노동보다는 좀 더 적성에 맞았는지 이 일을 꽤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다른 공장의 상환들은 밤에 야간학교도 다니며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김후남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이어갔다.

1983년, 무사히 야간학교를 졸업한 그는 더 이상 소년 김후남이 아니었다. 서울 생활도 오래 하다 보니 익숙해졌고, 밥이나 배불리 먹을까 하는 요량으로 식당에 취직하게 된다. 지상 5층, 지하 1층으로 홀 직원만 20여 명 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식당이었다.

지상 5개 층은 ‘신라’라는 한식당이었고, 지하에는 ‘비바’라는 고급 양식 레스토랑이 있었다. ‘신라’와 ‘비바’ 모두 한 사장의 소유였기 때문에 모든 직원이 함께 식사를 했는데, 비바의 바텐더 형이 김후남을 좋게 보았는지 한식당 일을 그만두고 레스토랑으로 와서 함께 일하자 제안했다.

그 형님의 도움으로 한식당 주방보조일을 그만두고, 레스토랑에서 나비넥타이 매고 품격 있게 일하는 멋쟁이로 변신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스토랑 주방장 할아버지가 그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던진다.

“젊은 사람이 기술을 배워 평생 먹고살 생각을 해야지, 나비넥타이 매고 겉멋 들어 접시 들고 왔다 갔다만 하면 어떡하냐. 그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 거 같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방장 할아버지가 몹시 미웠지만, 따지고 보면 날 걱정해서 해주는 말이었다. 그래서 며칠 후 할아버지에게 ‘제가 요리를 배울 수 있을까요?’ 물어봤는데 바로 OK, 그렇게 레스토랑의 주방보조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일하던 어느 날, 대한민국 모든 젊은 청춘의 걸림돌이 되는 군대를 먼저 해결할 생각으로 무작정 병무청을 찾아갔다. 기왕 가는 거 아주 험악한 군대를 다녀오려 했지만, 해병대 모병관의 조언을 받고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배치된 부대에는 ‘해병대 충창단’이 있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마음 한구석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음악적 꿈을 다시 한번 펼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오디션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 합격했다. 중창단 멤버 9명 중 8명이 음악 전공자였고, 내가 유일한 비전공자였다. 해병대 중창단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음악적 경험을 쌓아갔다. ‘호국 가요제’에 나가 우수상도 받고 포상휴가도 받을 만큼 인정받는 중창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음악과 함께 보낸 군대 생활도 끝나고, 나는 이 참에 음악을 전공하는 대학에 진학하겠다 마음먹고 요리사 일을 하면서 꾸준히 음악 레슨을 받았다. 하지만 음악이란 게 그렇게 곁다리로 들어설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이유들로 음악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

기왕 음악에 대한 꿈은 완전히 포기했으니, 좀 더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 싶어 자리를 옮긴 곳이 바로 ‘그레이스 리’라는 대한민국 미용의 대모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동숭동에서 ‘그레이스 리 커팅클럽’이라는 유명 미용실 원장인 그녀는 대단한 미식가였다. 미식가이다 보니 음식에 대한 조예와 지식도 깊었던 그녀는 직접 식당을 운영한 것이다.

그 식당의 할아버지 주방장에게 정식으로 고급스러운 일을 배웠다. 미식가가 운영하다 보니 맛있고 고급스럽게 음식을 만드는 제대로 만들어내는 법을 배웠다. 요리의 기본기를 익힐 수 있었고, 지금의 스타쉐프가 만들어내고 있는 모든 요리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 그레이스 리 여사가 자기 건물을 팔고 강남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식당을 처분하게 됐다. 그레이스 리 여사는 많은 직원들 중 유일하게 그를 챙겨 여기저기 좋은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그레이스 리 여사는 힐튼 호텔의 ‘시즌스’라는 당대 최고의 유명 식당에 그를 추천했지만, 그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잠깐 아르바이트식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신라호텔’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레이스 리 여사는 힐튼이 최고니 거기 가서 일하라 했지만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레이스 리는 신라호텔 유명 주방장에게 전화해 ‘이놈 하나만은 꼭 살리고 싶다’라는 말씀을 전했고, 나는 형식적인 면접을 거쳐 신라호텔의 정직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낙하산이라는 이유로 무리에 쉽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다. 밥을 같이 안 먹는 것은 예사였고, 진급 등 모든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결국 그는 신라호텔의 부주방장이 되었다. 그때 IMF가 대한민국을 강타했고, 당시 삼성생명 본사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외식사업부가 와해되고 직원들은 본사로 다시 들어가느냐, 아니면 퇴사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마침 그는 미국에 이민을 가서 요리 일을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당시 요리를 전공한 유학파 인원이 하나둘 들어오기는 했지만, 외국 현지에서 일한 경험자는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행을 틈틈이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이 위기를 기회라 생각하고 해외 현장 경험을 갖춘 인재가 되겠다는 다짐 하나로 1999년 신라호텔을 퇴사하고 미국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마음만 먹었다고 바로 갈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비자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고, 그마저도 거절당하게 되었다. 다시 1년이란 시간을 기다려 결국 미국 비자를 발급받고 2000년,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일을 구했지만 2001년 ‘9.11’ 사건이 터지며 외국인들의 비자 단속이 강화됐다. 비자를 연장하며 버텨야 했던 그에게 장기 체류는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가라앉은 8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있으니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대전에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을 하고 있던 그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바로 그가 퇴사했던 ‘신라호텔’에서였다. 당시 삼성은 퇴사한 직원의 재입사를 철저히 불허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극소수의 인재를 다시 삼성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 지시했고, 그 극소수의 대상자에 그가 포함된 것이다. 삼성을 퇴사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에 단 4명이 재입사 대상자로 선정됐고, 그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신라호텔에 재입사를 하게 된다.

비록 ‘삼성’에서 먼저 내민 손이었지만, 다른 직원들에게는 여전히 낙하산으로 인식되었는지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쌓은 경험도 살리며 최고의 음식을 만들 것이라는 그의 포부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그렇게 2004년, 그는 다시 스스로 ‘신라호텔’을 나오게 된다. 조직 생활을 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싶다는 더 큰 꿈을 갖고 있던 그는 2005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식당을 오픈하고 대박신화를 이뤄냈다. 여기에 힘입어 그는 1년 만인 2006년, 도곡동에 그의 이름을 내건 자신만의 식당을 정식으로 오픈하게 된다.

‘스타쉐프’ 바로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그의 딸이 지어준 이름이다. 당시 TV 요리 프로그램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본 딸이 ‘아빠도 TV 나왔으니 스타잖아, 스타쉐프로 이름 지어요’라 얘기했고 나는 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스타쉐프’로 상호 등록을 했다.

지금이야 스타쉐프란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말조차 없었기 때문에 특허청 상표등록까지 무사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06년 3월 김후남의 ‘스타쉐프’가 탄생했다.

오픈식 때 친구들을 초청해 오픈 파티를 열었는데, 그때 온 친구 하나가 신라호텔 1기생이자 외식사업부 구매팀장을 역임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우리 식당을 보고 다짜고짜 “후남아, 이거 빨리 접고 다른데 취직해라. 이거 큰일 나겠다”라며 진심 어린 염려를 담은 충고를 그에게 건넸다. 그 친구가 염려한 이유는 가게의 위치가 너무나도 후미진 안쪽에 있었기에 상권 형성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오픈식 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자신 있었기에 더더욱 그 친구에게 보란 듯이 성공시키고 싶었다. 한동안 그 친구의 말은 진짜 현실이 되었다. 하도 손님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한강 천을 달리고 있을 테니 손님오면 전화하라”하고 가게를 비우기 일쑤였다. 운동이 다 끝날 때까지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하루는 한 무리의 손님이 낚시해온 생선이 있는데 회를 떠줄 수 있냐 그에게 물어왔다. 그는 흔쾌히 손님들이 가지고 온 생선을 회로 만들어주었고, 손님들은 그의 가게에서 술자리를 이어갔다. 안주가 부족하자 그는 돼지고기로 만든 술안주를 내줬고, 손님들은 음식 맛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손님들이 단골이 되고 식당에 하나둘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식당이 있던 동네에는 유명한 아저씨 한분이 계셨다. 이 동네 토박이신데 모 금융회사 사장님이셨다. 그 사장님은 동네에 새로 생긴 식당을 찾아가 음식 맛만 보고 그 식당의 흥망성쇠를 점치는 동네 미식가였다. 그분이 어느 날 우리 식당에 와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내가 이 집 음식을 먹어보고 점을 좀 쳐 보겠소”하셨다.

음식을 다 드신 그분께서 하시는 말이 “지금이 6월이니, 이번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예약을 없이는 못 들어올 집이 될 것이요”라 점괘를 말씀해주셨다. 비록 점괘였지만 그는 그 말 한마디에 힘을 얻었고,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그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니 그의 식당은 이미 1주일치 예약이 꽉 차있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2년 후에는 한 달치 예약이 미리 꽉 찰 정도의 ‘대박 맛집’이 되어있었다.

그의 성공 비결은 간단했다. 그는 딱 15가지 메뉴만 했는데 그중 5가지는 다른 데는 없고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 그리고 또 5가지는 다른 식당에 있기는 하지만 그가 훨씬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메뉴, 나머지 5가지는 기본적으로 꼭 있어야 하는 메뉴. 이렇게 콘셉트를 잡았고 그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그리고 그만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식당 내 금연을 실시했다. 식당이었지만 요리와 술을 파는 술집에 더 가까웠던 그의 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술과 함께 흡연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담배 냄새가 요리의 향과 맛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깨달았고, 밤 10시까지는 식당 내 전체 금연을 실시했다.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도전이었지만, 오히려 고객분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그를 응원해줬다. 심지어 도곡동 고급 아파트 반상회의 안건으로 스타쉐프가 일요일에 문을 열 수 있도록 제안하자는 토론을 할 정도였다. 스타쉐프는 당시 일요일은 휴무였다.

2011년, 승승장구를 이어가던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발신인은 주한 미국 대사관이었다. 그 편지를 열어보고 그는 까맣게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2004년 신라호텔에 근무할 당시 알게 된 미국인 셰프가 그에게 미국에서 함께 일하자 제안을 했었고, 그는 2002년 포기했던 미국에서의 삶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미국인 셰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2004년 신청한 비자 인터뷰에 대한 회신이 7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어차피 인터뷰니 안될 수도 있고,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미국에 안 가는 게 더 좋더라 느낄 정도로 스타쉐프는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래도 우편이 왔으니 가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대사관 인터뷰에 참석했다. 그는 일부러 거절당하기 위해 미국에 대해 잘 모르고, 영어도 못한다 얘기했다. 그의 그런 솔직함이 통했는지 그의 가족 모두에게 영주권 비자 승인이 떨어졌다.

그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미국에서의 꿈을 다시 한번 이루기 위해 스타쉐프를 선배에게 건네고 무작정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 도착하니 영주권 비자가 3주 만에 나왔고 그렇게 그 미국인 셰프와 함께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레스토랑은 하루 매출이 3만에서 4만 불 이상되고, 스테이크가 하루에 200개에서 300개가 나갈 만큼 큰 식당이었다. 완벽한 조건이었지만 그가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달라스의 무더운 여름이었다. 더욱이 주방이다 보니 그 열기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고심 끝에 레스토랑을 퇴사하고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다.

뉴욕에서 자신만의 식당을 오픈하려 준비했지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양식 요리 전문 셰프이기 때문이다. 그가 양식 레스토랑은 미국에서 오픈하는 것은 마치 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한식당을 차리는 것과 같았다. 그는 뉴욕에서의 미래를 설계해가며 틈틈이 자원봉사에도 참여했다. 뉴욕에서 일하는 셰프들이 모여 불우한 이웃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봉사하는 황동이다. 그는 이 활동을 하면서 달인의 경지에 오른 한 셰프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가게에서 무보수로 일을 하며 진정한 양식의 스타일을 전수받았다.

그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스타일을 전수받고 나서, 그가 그만의 레스토랑을 차릴 수 없는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짐이 다시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그는 한국에서 멋진 요리를 선보일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그는 하염없이 발품을 팔며 이곳저곳을 다녔고, 그렇게 찾아낸 보물 같은 장소가 바로 지금의 ‘스타쉐프’가 있는 방이동이었다. 그는 일말의 고민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가 미국에서 달인에게 전수받은 비법과도 같은 스타일로 음식이 만들어졌고, 그는 다시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사람이 만든 사람’이라 칭한다. 기로의 순간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고,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어주었다. 혹자는 ‘한 군데 오래 진득이 있지 못한다’며 그를 나무랄 수도 있지만, 그는 그가 걸어갈 길을 찾아다녔을 뿐이다. 그 길의 끝에는 ‘셰프’라는 직업이 있었다. 그는 좀 더 나은 셰프가 되기 위해 이길 저길 을 찾아다녔을 뿐 이미 그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또 그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반복의 연속’이라 말한다. 한번 들어가기고 힘든 신라호텔에 3번 입사하고, 미국에 두 번이나 갔고, 또 두 번이나 자신의 가게를 오픈했다. 이 반복의 연결고리를 이어준 것도 그를 도와준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꿈이 생겼다. 자신만의 가게를 가지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실력 있는 요리사를 발굴해 ‘스타쉐프 by OOO’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된장찌개를 정말 맛있게 한다면 ‘된장찌개전문점, 스타쉐프 by OOO’으로 상호를 정하고 그 요리사의 이름을 걸어주는 것이다. 요리사에게 있어 자신의 이름을 건 식당을 갖는다는 것은 꿈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꿈을 이뤄주고자 한다. ‘파스타 전문점, 스타쉐프 by OOO’, ‘육개장 전문점, 스타쉐프 by OOO’

기존의 프랜차이즈는 똑같은 스타일, 똑같은 메뉴에 위치만 바뀌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후남 셰프가 꿈꾸는 프랜차이즈는 사람 프랜차이즈다. 그것도 각기 다른 음식을 최고로 잘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프랜차이즈. 음식이 검증되면 매장 오픈의 90%를 김후남 셰프가 투자한다. 요리사는 자신의 수익중 일부를 식당에 장기간 재투자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식당으로 갖게 된다. 요리 ‘OOO’에 있어서는 ‘OOO’ 셰프가 최고라는 것. 요리사에게 그 영예를 안겨줄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지금 김후남 셰프가 꿈꾸고 있는 또 하나의 미래다.

만약 당신이 단 한 가지 요리만은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 자부한다면, 주저 말고 김후남 셰프를 찾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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