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개그맨 이홍렬

이홍렬은 대한민국의 레전드급 코미디언이자 개그맨, 방송 MC다. 1954년생으로 서울공고를 졸업하고 DJ로 활동하던 중 ‘사랑의 미로’ 작사가인 ‘지명길’과의 인연으로 방송인 허참을 만나 방송가에 입문했다. 코미디쇼와 버라이어티 방송의 진행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며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80년대 청춘만세, 영 11, 일요일 밤의 대행진 등 당대 최고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국민 코미디언의 반열에 올랐다. 1991년 최고의 위치에 있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돌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내공을 쌓아 귀국한 그는 다시 방송계에 복귀해 최고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한다.

1993년 임하룡과 함께 선보인 ‘귀곡산장’은 코미디 콩트의 레전드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였던 공포물을 콘셉트로 여성 게스트를 초대해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신선한 소재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96년에는 최고 스타만의 전유물인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 ‘이홍렬쇼’를 선보이며 국민 코미디언에서 국민 MC로 등극한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게스트로 출연하며 이홍렬쇼는 유명 스타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최고의 프로그램이 되었다. 특히 ‘참참참’이라는 코너는 유명 스타와 함께 밤참을 만들며 토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당시에는 획기적인 소재로 극찬받았다.

또 이홍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 바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 속 코너였던 ‘한다면 한다’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홍렬이 한다면 한다!’를 외치고 극한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포맷은 현재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조상격인 프로라 회고되고 있다.

이홍렬은 ‘뺑코’라는 별명으로 유명한데 이는 이경실의 콩트 ‘도루묵 여사’에서 이경실의 권유로 콧구멍에 500원짜리 동전을 성공적으로 넣었다 뺐던 것에서 유래한다.

2000년에는 SBS의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 출연하며 연기자의 면모를 과시한다. 코믹한 시트콤임에도 불구하고 이홍렬은 열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연기자 ‘이홍렬’로 다시 한번 그의 저력을 과시했다.

2014년에는 MBC 코미디의 부흥을 위해 ‘코미디의 길’로 복귀해 후배 개그맨과 모큐멘터리 형식의 코너를 진행해 MBC 코미디의 부활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MBC 코미디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코미디의 산 역사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이홍렬. 그는 이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자신을 위한 또 하나의 옷을 차려입는 중이다. 유튜브 ‘이홍렬 TV’를 오픈해 다시 한번 대중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려 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언, 방송 MC에서 감동을 선사하는 유튜버로 변신한 이홍렬을 만나 그가 간직한 아름다운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눠봤다.

[이홍렬]

레전드 매거진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무려 40년째 너무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이홍렬입니다. 이렇게 여러분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받았던 사랑을 한 분 한 분께 되돌려 드리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 국민 분들께 변함없는 웃음과 즐거움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행동에 옮기고자 다시 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는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유튜브’라는 플랫폼인데요, 혹자들은 나이 60이 넘어 무슨 인터넷 방송이냐 하시는 분들도 간혹 계십니다. 사실 제가 유튜브 계정을 만든 건 2013년이었어요. 그런데 이 유튜브가 저한테는 참 낯설게 느껴지더라고요.

40여 년간 활동했던 방송국에 비해 솔직히 너무나 단출한 무대에 서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18년 4월, 16년간 키우던 애묘 ‘풀벌’이가 구강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때 부랴부랴 ‘풀벌’이의 남은 시간을 영상에 담아야겠다 다짐했어요.

저는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도 가정용 카메라로 모든 일상의 순간을 담았습니다. 30년 이상을 해왔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죠. 최근에는 그 방대한 영상 자료를 디지털화해 소장하고 있죠.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이홍렬, 그리고 이홍렬 TV]

2018년 6월 ‘풀벌’이와 저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최초로 공개하며 저도 소위 ‘유튜버’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웃음) 저는 구독자수나 좋아요, 댓글에는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이홍렬이라는 한 인간과 16년 세월을 함께 해온 ‘풀벌’이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었죠.

풀벌이의 일상을 촬영하던 중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풀벌이를 촬영하며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리고 이 둘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음식 투정하던 모습과 풀벌이가 음식을 가리는 모습 등 교차점을 찾게 되었고 그때부터 풀벌이의 일상과 과거 우리 가족 영상을 합쳐 하나의 콘텐츠를 만들게 되었죠.

이렇게 ‘풀벌 이야기’라는 코너로 이홍렬 TV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 친구 두 명과 함께 아재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강화 아재’라는 코너도 만들고 있고요. 이렇게 조금씩 콘텐츠를 만들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독자수가 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저 저를 기억하는 몇몇 분이 좋아하시나 보다 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홍렬 TV’를 오픈한 지 6개월도 채 안돼서 구독자수가 1만 명이 넘는 경이로운 광경을 지켜보면서 ‘유튜브라는 것을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1만 명을 돌파하니 공중파, 지상파 방송국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홍렬 TV’ 덕에 다시 방송국 카메라 앞에 인터뷰를 하게 된다는 게 놀라웠죠.

저는 인터뷰에서 중년들에게 힘이 되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여러 방송국 코미디실의 몰락을 지켜보며 그 현장에 있었는데요. 그 당시에도 저는 ‘한국의 코미디는 물론 저의 존재도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이 유튜브는 그런 절망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더 많은 중년분들과 공유하고 싶었죠. 올해 안에 3만 명에서 5만 명의 구독자를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구독자수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저는 구독자수를 올리려 아무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제 인생이 녹아내린 콘텐츠를 만들 뿐이죠.

많은 분들이 그 콘텐츠를 사랑하고 기꺼이 저에게 한 표를 던져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한 표 한 표가 모여 지금은 1만 1000명을 넘어섰어요. 자칫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릴 뻔한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응원의 손길을 보내주시는 것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하려 합니다.

[인간 이홍렬]

코미디언에서 개그맨, 그리고 MC. 이제는 방송인으로 불리는 저는 그렇게 40년을 방송과 함께 해왔습니다. 제가 이토록 오랜 시간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히 저에게는 ‘가난’이라는 최고의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이 ‘가난’이란 게 얼마나 그 사람에게 큰 힘을 주는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저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죠.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가난에도 사람마다 갖가지 사연과 이유가 있습니다. 가난의 시작은 비록 달랐지만 그 끝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내 잘못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것은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절대 돈은 당신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꿈입니다.

혹자는 ‘40년 동안 방송하면서 벌거 다 벌어놓고 저런 소리하네’라고 핀잔을 주실 수도 있지만 저 역시 코미디언이라는 큰 꿈을 이룬 것이지, 큰돈을 번 것은 아닙니다. 연예인들이 관중 앞에 서는 무대가 화려하다 보니 우리 방송인들 모두 화려하게 살 것이라 생각하시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정말 꿈을 이루려던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저도 무작정 코미디언이라는 꿈만 꾸며 살아가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가난했습니다. ‘돈이 없어 이걸 못했다, 저걸 못했네’ 아쉬워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부모님이 계셨고 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집안이 가난한 것은 절대 한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 자체가 너무 가난한 나라였으니까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우리를 도우러 올 정도였으면 우리나라 상황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이 되실 겁니다.

그런 가난한 나라,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하늘이 제게 내려준 선물은 바로 ‘맑은 가난, 축복된 가난’이라는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그 누구보다도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고 깨끗한 몸으로 세상에 맞서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 중 2 때일 거 같아요. 그때 처음으로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온 동네 사람이 TV 앞에 둘러앉아 구봉서 선생님, 서영춘 선생님, 배삼룡 선생님이 출연하는 코미디 프로를 보며 다 같이 열광하던 때였죠.

코미디언의 말 한마디에 수십 명이 웃고, 코미디언의 몸짓 하나에 수십 명이 또 웃었어요. 저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이구나. 그럼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는 거네? 정말 막연한 코미디언에 대한 동경은 그때 시작되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추로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돈이 조금 필요할 거라 생각했죠.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매일 새벽 신문을 그렇게 꿈을 키워갔습니다.

[꿈을 향한 일탈]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본격적으로 방송국 이 곳 저곳을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돈도 인맥도 없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발품을 파는 일뿐이었죠. 빈손으로 또 맨몸으로 부딪히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분이 ‘사랑의 미로’의 작사가이신 지명길 선생님이셨습니다. 지명길 선생님께서 저를 예쁘게 봐주셔서 당시 활발한 활동을 하던 ‘허참’ 선배님에게 소개시켜주셨죠.

허참 선배님은 직접 저를 데리고 함께 방송국 PD분들을 찾아가 일일이 인사를 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해주신 말씀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가 너를 데리고 인사를 다니지만 곧 저 사람들이 너를 찾게 될 거고, 연락을 하게 될 거아”

저는 당시에는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저 PD분들이 과연 내게 연락을 할까? 하지만 그 말씀은 곧 현실이 됐고, 그렇게 저는 정식으로 방송에 나오는 방송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부모님의 빈자리]

그렇게 방송인이라는 일을 시작해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가 방송을 하며 항상 생각하는 것은 ‘부모님이 이 모습을 보셨으면 얼마나 행복해하셨을까’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TV에 나오는 성공한 모습을 보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49세라는 너무나 젊으신 연세에 돌아가셨기에 저의 그리움은 더욱 사무칩니다.

저는 아직도 어머니 생전의 육성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끔 꺼내 들어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저를 더욱 슬프게 만들더군요.

청춘만만세, 일요일 일요일 밤에, 귀곡산장, 이홍렬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 100여 편이 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모습을 부모님께서 보셨다면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뺑코’라는 국민 캐릭터가 탄생하기까지 젊음을 바쳐 쏟아부었던 도전, 그리고 스타의 반열에 오른 뒤 따라온 책임감, 그 책임감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을 성실하게 신용을 지키며 살아왔던 지난날들, ‘숏다리’라는 말만 들어도 저 이홍렬을 먼저 떠오르게끔 만들었던 그 모든 순간에 부모님은 저와 함께 하시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코미디]

저는 제가 ‘최고의 위치에 있을 때 만약 부모님이 계셨다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셨을 거야’라고 상상해 본 말들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곤 합니다. ‘후배들을 통해 즐거워지고 싶다’ 말하죠. 이 말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는 자만하지 말라는 충고가 될 수 있고, 못 나가는 후배들에게는 힘을 주는 응원의 한 마디가 될 것입니다.

절대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되 절대 ‘기고만장’ 하지는 말라는 당부도 함께 전하죠. 지금 한국의 코미디는 정말 ‘의기소침’ 그 자체입니다. MBC는 코미디언실이 아예 없어져 버렸고요, SBS ‘웃찾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설 자리를 잃은 후배 코미디언들은 생계를 위해 할 일 못 할 일 안 가리고 덤벼들고 있는 상황이죠.

저 같은 원로 개그맨이야 해외 한인을 찾아가 공연을 하며 무대에 계속 설 수 있지만, 후배 개그맨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진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성공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 이미 무대를 잃은 이들을 다시 찾아주는 곳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죠.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던 유능하고 젊은 인재들은 다시 생계를 위해 관객의 품으로 돌아왔죠. 무대에 서야 하는 배우가 무대를 잃었다는 절망감의 깊이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들에게 ‘의기소침’ 하지 말라는 말을 항상 전하게 되더군요.

[나눔으로 펼쳐지는 제2의 인생]

저 역시 무대를 잃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온 청춘을 불살랐던 무대에서 내려올 때 느껴지는 그 공허함은 이로 말할 수 없죠. 그 기분을 느끼기 싫어 제가 설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 갔습니다. 일단 위축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나눔’이었습니다.

이 나눔은 내 가슴속 감사한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강의를 하면서 많은 은퇴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은퇴 후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돈을 벌고 싶다’이고 또 하나는 ‘나누고 싶다’입니다.

강연에서만 말로 전하는 것보다 내가 이 나눔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국토대장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이사인 저는 가난한 아프리카와 스리랑카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자전거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아프리카와 스리랑카는 수자원이 넉넉지 못해 물을 구하러 가는데 굉장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이 시간을 단축해줄 수 있는 것이 자전거라 생각하고 이 선물을 주겠다는 일념으로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국토대장정을 마치고 나니 목표액의 3배가 넘는 성금이 모였습니다.

이 국토대장정을 실천하며 어려운 아이들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눔을 실천하고자 하는 분들께도 길을 열어드렸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메세지]

이 나눔을 원하는 은퇴자의 연령대가 바로 740만 명에 육박하는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던 처절한 가난을 맛보았죠. 사실 이 ‘베이비부머’들은 어려운 시절을 다 겪고, 이제 조금 편해지니 은퇴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간절하죠.

저는 이분 들게 ‘4S’를 강조합니다. 해야 할 두 가지 S는 ‘Smile’, 그리고 ‘Service’입니다. 반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는 ‘Silver 파산’ 그리고 ‘Sick’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도전했다가 실버 파산하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혹시나 힘든 중년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에게 미약한 힘이라도 될까 하는 마음으로 ‘이홍렬 TV’를 운영하기도 하죠. 그 외에도 현재 3개의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연극과 강의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저는 남은 인생의 목표를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리자’로 정했습니다. 아직까지 ‘좋은 어른’은 아니지만 꼭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평생 과분한 사랑을 받은 제가 여러분께 그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저의 길지만 짧은 인생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홍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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